연구의 실제

창현의 이야기

앞서 연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파인만 알고리즘 이야기에서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고, 연구인 것과 연구가 아닌 것에 관해서도 이야기 했다. 이번 글에서는 연구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최근에 논문을 쓰면서 겪은 일들을 소개하면서 연구에 담긴 여러 일을 한 번 소개해보려고 한다. 연구 내용을 최대한 함축적으로 간단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내 전공 분야는 교통, 물류 분야의 최적화이다. 정부가 모종의 이유로 교통, 물류 네트워크에 규제를 도입하고 그 규제를 설계할 때, 시장이 그 규제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예측하는 모델을 가지고 논문을 몇 편 쓰고 있을 당시였다. 내 분야의 여러 학자가 전통적으로 써 오던 간단한 반응 예측 모델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었다. 그런 간단한 모델을 갖고 논문을 몇 편 썼고, 계속해서 다른 작업에도 이용하고 있던 찰나였다. 별 의심 없이 그 모델을 쓰고 있었지만, 이 모델이 도저히 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제에 대한 시장의 반응에는 불확실성이 포함되어 있을 터인데, 그 불확실성을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모델링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대학원생과 동료연구자와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내 연구 분야에서 불확실성을 다루는 로버스트최적화(Robust Optimization)이라는 기법이 있다. 이 기법을 이용하여 이전에 몇몇 연구를 진행해본 적이 있었기에, 이 기법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응용하여 시장 반응에 내포된 불확실성을 모델링 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로버스트최적화에서 말하는 불확실성과 내가 다루던 불확실성의 종류가 미묘하게 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른 시일 안에 시간 내에 모델을 개발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연구 진행은 아주 더뎠다.

그러던 중, 다른 교수와 함께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아주 흥미롭게도, 혹은 절망적이게도, 그 교수는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소개받은 연구는 로버스트최적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고, 그 뿌리를 행동경제학에 두고 있었다.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행동경제학 주제와 내 연구가 연결고리가 생긴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내가 하고 싶던 연구가 이미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절망적이었다. 연구에서는 대체로 그렇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좀 알아보다 보면 이미 비슷한 연구가 다 되어 있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연구 주제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섭섭했지만 내가 다루던 문제에서는 처음 응용되는 것이므로 작은 논문은 쓸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계속 진행했다. 행동경제학에 바탕을 둔 방법을 내가 생각하던 특정 문제에 응용해서 적용해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잘 마무리해둔 연구를 그대로 실수 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진행되었고, 파인만 알고리즘의 2단계 ‘열심히 생각한다’만 잘하면 되었다.

하지만, 원래 생각하고 있던 로버스트최적화 기법을 응용한 방법에 자꾸 미련이 생겨서 그쪽으로도 연구를 계속했다. 연구를 계속했다기보다는 ‘왠지 될 것 같은데, 왠지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러 관련 문헌을 읽던 도중, 접근 방법이 전혀 반대 방향인 행동경제학과 로버스트최적화를 이용한 두 가지 모델링 방법이 별로 다르지 않고 심지어 같은 결과를 낳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럴듯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아몰랑 연구 방향을 바꿔서 정말 같은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전혀 다른 방법이기 때문에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같아지는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조건을 생각해봤다. 가장 간단하고 다른 연구에도 쓰이고 있던 조건들을 비교하다가 두 가지 방법이 같아지는 조건 하나를 찾았다. 같다는 증명이 필요했는데, 증명에는 ‘통행료’ 계산에 주로 사용하던 기법을 응용해서 사용했다. 이 역시 나에게는 굉장히 재미있고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통행료 계산은 예전에 몇 차례 다루어본 적이 있는 주제였다. 내가 지금 하는 연구는 통행료 계산과 큰 연관이 없는데, 연구 내용은 연결이 되었다. 내가 지금 하는 이 연구를 하려고, 예전에 내가 통행료 계산 연구를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방법이 같아지는 조건을 하나 찾은 다음, 다른 조건들도 찾기 시작했다. 직관적으로 말이 될 것 같은 조건을 만들어내고 실제로 같아지는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봤다. 틀림없이 같아진다고 생각했던 조건들이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몇 주 후 혹은 몇 달 뒤에 발견했다. 조건들을 계속해서 수정해가면서 여러 가지 실험과 증명을 반복했다. 심지어 두 방법이 같아진다고 증명했다고 믿었던 조건을 실제로 적용해서 실험하다 보니, 뒤늦게 증명이 틀린 것을 알아채는 일도 허다했다. 내 머리가 나빠서 이런 간단한 증명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자책하는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이런 실패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내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두 가지 방법이 같아지는 다른 조건 하나를 찾아냈다.

원래의 방향과는 제법 달라졌지만, 이런저런 일들 끝에 즐거운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연구 경험을 통해서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보겠다. 대놓고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테니 글을 읽는 분들께서 잘 가려서 들어주시기 바란다.

아이디어를 남에게 이야기하라

이 단락의 제목은 유명한 로봇공학자 가나데 다케오 교수님의 책 ‘초보처럼 생각하고 프로처럼 행동하라‘에서 빌려왔다. 많은 대학원생 연구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여러 가지 불안감을 느낀다. 내가 가진 아이디어가 굉장히 새로운 것 같아서 남들에게 이야기하면 빼앗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경쟁이 심하고 진행 속도가 빠른 분야일수록 아이디어를 빼앗겼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자신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제로 연구 결과물로 만들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많은 경우 어디에선가 막혀서 처음 기대처럼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에게 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어지고,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서 그 사람이 먼저 내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풀어버릴까 봐 겁난다. 그러면 내가 연구에 보낸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되고 나의 야심 찬 졸업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초조해하기만 한다.

가나데 다케오 교수님은 이런 경우에 아이디어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에 동의한다. 가나데 다케오 교수님의 말을 옮긴다.

“당신이 이야기하기 전에 상대방은 미처 몰랐는데 상대방이 먼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요컨대 상대방은 처음부터 좋은 결과를 얻을 확률이 당신보다 높았다는 뜻이다. 결국 아이디어를 말하고 안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볼 때 상대방에게 졌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때는 빨리 포기하는 편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이디어는 남에게 이야기하면서 나누자. 정말 ‘핫’한 분야의 정말 중요한 핵심 문제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는 다른 사람들은 내가 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내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크게 관심도 없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하고 나누자. 이야기 할수록 나에게 도움이 된다. 남에게 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다가 내 생각도 정리가 되고 문제점도 자연스럽게 파악되는 경험은 많이들 해봤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럴 듯 해보는 아이디어라고 해도 실제로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굉장히 험난하다. 실제로 실행되었을 때 그 아이디어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떠오른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같은 분야에 있다 보면 몇몇 아이디어는 어느 연구자나 공통으로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다가 나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다른 연구자에게 빼았겼다고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가나데 다케오 교수님의 말씀처럼 상대방이 내가 이야기한 아이디어를 미처 몰랐었으나 나보다 더 훌륭했기에 실행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경우도 있지만, 그 이전에 내가 말했던 아이디어가 실제로는 스쳐 지나가는 별것 아닌 단순한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아이디어는 가다듬고 실행해야 의미가 있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듣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 예의이다. 논문 마지막 부분에 감사를 표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논문의 공동저자로 초대해서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걸작(傑作)이나 대작(大作)보다 습작(習作)에 충실하십시오

이 단락의 제목은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이 쓰신 글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에서 빌려왔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읽을 수 있다. 학문에 뜻을 가진 사람에게 큰 힘이 되는 조언이 많으니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여러 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나는 학생 때 멋진 논문을 쓰지 못했다. 특히 처음에는 내가 쓰는 이 논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다른 사람이 읽어 주기나 할지를 걱정했다.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는 것으로 생각했고, 이 세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을 위해 헛심을 쓰는 것이 될까 불안했다. 대학원에 들어왔으니 졸업은 해야겠고, 교수가 되었으니 승진은 해야겠으니 사치스러운 고민은 접어두고 논문을 쓰기나 쓰자는 마음으로 여러 해를 보냈고 그렇게 여러 논문을 썼다. 열심히 했지만 내 연구를 대표하는 논문이라고 말하기엔 선뜻 내키지 않는 논문들만 늘어갔다. 졸업과 승진을 핑계로 덮어두었던 고민이 다시 올라올 때면 이건 연습이라는 마음으로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러던 중 오욱환 교수님의 글을 읽었고 마음의 큰 위안을 얻었다. 습작에 충실했고, 대작은 아니지만 좀 덜 부끄러운 논문을 하나 썼다. 적어도 즐거운 연구를 했다.

내 경우엔 ‘통행료 계산’이나 ‘로버스트최적화’ 관련 연구를 했던 게 ‘습작’이었던 거다. 큰 의미 없어 보이는 연구를 했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그 연구 ‘연습’이 나중엔 결국 다른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었던 거다. 별 상관없이 흩어져있던 작은 연습들이 하나의 연구에서 모이며 좀 더 흥미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했다. 습작에 충실하다 보면 나처럼 평범한 연구자도 언젠가 대작이나 걸작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습작은 연습이니 대충 적당히 해도 된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적당히 내놓은 결과물을 받아줄 학술지는 별로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그 연습이 나중에 모여서 대작이 되는데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습작에 ‘충실’해야 한다.

연구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뭔가 열심히 하다가, 수많은 과정을 거쳐서, 결국에는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는 과정이다

내가 쓴 이전 글에서 다시 빌려왔다. 애초에 나는 시장의 반응을 예측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두 가지 다른 모델링 방법이 같아지는 조건을 찾는 연구를 했다. 처음엔 두 가지 방법이 같다는 생각도 못 한 채 두 가지 방법을 써서 연구를 따로따로 진행하던 도중에 혹시 같은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두 가지 방법이 같아지는 조건도 수차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뒤에서야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처음에는 핵심이 되는 몇 가지 키워드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시작하게 된다. 여러 가지 고민이 진행될수록 대략적인 방향성을 가지게 되고 몇 가지 가설을 세우게 된다. 연구의 방향성은 계속해서 변하게 되고 참일 것으로 생각되었던 가설 역시 잘못 된 것으로 판명되면서 여러 단계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연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갈 때가 되어서야 내가 풀었던 문제가 어떤 문제였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답을 쓰게 된다.

파인만의 문제 해결 알고리즘에서는 문제를 쓰고, 그런 다음 열심히 생각해서 답을 찾아내지만, 실제로는 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생각하다가 문제를 쓰게 된다. 파인만 알고리즘의 1단계, ‘문제를 쓴다’를 잘할 수 있으면, 많은 경우 연구는 거의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그저 조금 열심히 생각하면 될 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연구가 거의 끝나가야 문제를 쓸 수 있다.

이미 출판된 논문은 질문과 답이 이어지는 구조가 잘 정돈되어 있고 그 과정도 부드럽게 보여서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연구도 과정의 처음과 끝을 모두 살펴보면 논문에서 읽히는 것처럼 깔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찾다가 다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조금 더 큰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오랜 기간 거치며 여러 실패를 겪은 뒤에 얻은 결과물일 것이다. 충실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생각을 다듬는 방법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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