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꼰대질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대학원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글과 책은 언제고 쓰고 싶었지만, 공동 집필 프로젝트에 덥석 참여하기로 하고 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꼰대질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박사학위를 마친지가 어느덧 8년이나 지났고, 나는 내가 박사과정 학생일 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것이 힘들었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흐려진 기억 속의 즐겁고 아름다웠던 젊은 20대 시절이었다는 것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이미 나는 올챙이적 기억을 하지 못하는 개구리가 되어 버렸다. 내가 쓰는 글들은 어쩔 수 없이 내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이야기일지 언데, 결국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꼰대질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글 쓰기가 조심스럽고 겁난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숨길 수 없는 꼰대 본능 독자가 알아서 잘 판단하고 흘려들어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집필 프로젝트에서 세명의 저자가 공통적으로 할 이야기는 아마도 “니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잘 사세요” 일 것 같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할 이야기는 그렇다. 안 그래도 고달픈 대학원 생활인데,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 모든 부분을 온전히 내 마음대로만 할 수는 없겠지만 — 더욱더 괴로운 생활이 될 것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기만의 생각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이 잘 전달되기만 한다면, 꼰대질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은 독자들께서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굳이 몰라도 되는 것까지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다. 불필요한 정보로 불필요하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때로는 생각을 단순화시켜서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가리는 것 역시 독자께 맡기기로 한다.
대학원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지도교수이다. 나는 이미 지도교수의 입장에서 지내온지 벌써 8년이나 되었다.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보낸 5년의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학생의 반대쪽 입장에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은 그다지 생생하진 못 할 것이다. 어쩌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대학원 선배로써 해줄 수 있는 생생한 조언은 공동 집필을 하시는 두 분께서 잘 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대학원생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역설적이게도 지도교수의 시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다른 두 분이 지도교수를 어떻게 정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신다면, 나는 교수들은 어떤 학생을 지도하고 싶어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학생과 지도교수의 관계는 굉장히 오묘한 것이어서 흔히 결혼에 비유되기도 한다.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단순하다면 단순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학생이 교수에게 쌓이는 불만은 아주 여러 형태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것의 일부에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교수들의 생활은 어떠한지, 교수는 어떤 고민을 하며 사는지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수의 입장과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해서, 좀 더 잘 이용해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 대학원은 사실 학생이 교수를 이용해 먹는 곳이다, 아니 이용해 먹어야 하는 곳이다. 자신이 바라는 연구를 위해서 부족한 경험과 지식을 교수에게서 빌려오고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훈련을 해 나가는 곳이다. 나는 내 글이 학생들에게 그런 면에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2011년부터 ‘잡생각 전문 블로그‘라는 이름으로 개인 블로그에 글을 가끔씩 써오고 있다. 그중 ‘박사과정 학생이 유의해야 하는 점‘을 포함한 글 몇 편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면서 이 책의 집필에 참여하게 되었다. 윤섭 님께서 ‘슬라이드계의 강남스타일’이라 불리는 슬라이드에 내 글을 추천해주셨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원래 잡스러운 개드립을 날리는 블로그를 꿈궜으나… 아아…
‘박사과정…’ 글이 많이 읽히는 걸 보면서 좀 놀랬다. 따지고 보면 그 글에서 내가 한 말은 딱히 특별할 것도 없고 둘러보면 여기저기서 많은 분들께서 이미 했던 말을 반복한 것뿐이다. ‘자기 주도의 자기 연구’라는 당연하게 들리는 말을 했다. 수업 듣고, 필기하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등 주어진 문제를 잘 풀어야 하는 ‘공부’라는 것과, 문제조차, 그것도 이 세상에서 아무도 푼 적 없는 문제를, 내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연구’라는 것은 굉장히 다르다. 많은 이들이 공부와 연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내 글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한 것이 여러 번 읽힌 이유가 아닐까 추측한다.
또 한편으로는 댓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학원에서 연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가 하는 비슷한 고민들이고, 끝날 때 즈음이면 대체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글을 읽는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도 마음에 큰 위로와 용기가 된다. 학위 과정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용기,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용기가 되고, 학생 지도에 더 힘을 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박사과정…’ 글을 쓴 것이 벌써 2011년, 5년 전의 일이다. 그 글을 읽었던 박사과정 학생들이 졸업을 했고,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그 글을 읽었던 학생들은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다. 몇몇 분들께서 시작할 때 내 글을 읽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몇 년이 지나 다시 댓글로 남겨주셨다. 내 글이 그분들의 성취의 이유였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박사과정 하다 보면 고민들이 쌓이고 그 고민들 속에서 비슷한 결론들에 도달했을 것이고, 비슷한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다. 내 글이 없었어도 원래 다 잘 되었을 일들이다. 진리의 될놈될 다만, 내 글이 그분들께 ‘그래 네 생각이 맞아. 우리 모두 다 같은 의견이다.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봐. 네 연구잖아.’ 라며 등 떠밀어 준 역할은 어느 정도 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고자 한다.
아이엠 그라운드… 나는 카이스트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생산공학을 전공하는 연구실에서 석사과정 학생으로 한 학기를 지냈다. 수많은 고민들 속에 첫 해 여름을 보냈고, 결국 석사과정을 휴학/자퇴하고 웹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회사에서 자바 프로그래밍 일을 했다. 많은 고민 속에서 가져온 작은 이 변화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수학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수학을 좋아했었다. 수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용기는 없어서, 수학을 비교적 많이 쓴다고 하는 기계공학을 전공으로 택했었다. 석사과정 첫 해 가을학기를 시작하고 몇 주 후에 휴학을 했었는데, 휴학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광학’ 수업 중에 수학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마음에 아쉬워서 필기하다 말고, sin x, cos x를 노트에 몇 번이고 끄적였던 기억이 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교과서 밖의 세계를 처음 경험했고, 자연스레 ‘사람’ 혹은 ‘인간’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간공학’ 전공으로 산업공학과에서 더 공부하고 싶었다.
미국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의 산업공학과에 인간공학 박사과정 학생으로 입학했다. 웬일인지 첫 학기에 인간공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선형계획법(Linear Programming)이라는 최적화 수업을 듣게 되었다. 선형대수학 등의 수학을 제법 많이 쓰는 수업이다. 그리고 나는 최적화와 관련된 운영 과학(Operations Research)이라는 분야를 내 전공을 택했고, 그중에서도 지도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교통(Transportation) 분야의 연구를 했다. 결국 수학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는데 흥미를 느꼈고 그걸 좋아해서 지금껏 즐겁게 연구하고 있다.
박사학위 후에는 미국 뉴욕주 버팔로라는 도시에 있는 뉴욕주립대학교(State University of New York) 혹은 버팔로대학교(University at Buffalo)라고 불리는 곳에서 7년간 교수로 근무했다. 버팔로는 눈이 아주 많이 오는 곳인데, 기껏해야 눈 좀 내리는 블리자드 마법 공격에 몬스터들이 쓰러지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곳이었다. 2015년부터는 플로리다주 탬파라는 도시에 있는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University of South Floria)로 옮겨서 근무 중이다. 여름이면 아주 습하고 더워서 에어컨 없이는 생활 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곳이다. 두 곳 모두 산업공학과이다. 두학교에서 그동안 석사과정 학생 6명, 박사과정 학생 7명을 지도 혹은 공동지도했다. 지금 현재는 박사과정 학생 4명을 지도하고 있고, 다음 학기부터 새로운 박사과정 학생 2명을 더 지도할 예정이다.
이 책을 쓰는 세 명 모두 공학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순수 자연과학 분야나, 인문사회 분야, 예술과 체육 관련 분야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있을 수 있고,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가 서로 다르게 설정될 수도 있겠다. 내 전공에서는 대체로 교수와 학생이 1대 1로 만나서 논문 지도를 하고 논문을 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내 분야에서 박사 후 과정(포닥)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는 5년간의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운이 좋게도 바로 교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박사 후 과정이 수년간 계속되는 것이 당연한 전공과 그렇지 않은 전공 사이의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생긴지 수천 년 된 학문과 생긴지 몇십 년 밖에 되지 않은 학문 사이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라는 행위의 본질은 그리 다르지 않을 터이니, 우리 세 명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 들어봐 주길 바란다.
사실 나는 내 블로그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이미 할 만큼 했다.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몇몇 관련 글을 모아두기도 했다. 이 책 중간중간 그 글들을 다시 정리하고 재구성하여 쓰는 일도 있을 것이다. 같은 요지의 글이 반복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해 바란다. 세 명의 저자 사이에서도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겹쳐서 하는 경우도 있을 터이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것이니 한 번 기대를 갖고 봐주기를 바란다.
이 책이 완성되었을 때 어떤 책이 되어 있을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남의 대학원 생활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꼰대서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던져주는 좋은 책이 될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한 번 두고 볼 일이다.
밑밥은 깔만큼 깔았으니 다음 편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놓고 꼰대질을 시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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