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와 장비병

창현의 이야기

사진을 취미로 하시는 분들은 ‘장비병’에 대해서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내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괜시리 내 카메라와 렌즈가 저렴한 제품임을 탓하게 되고, 훌륭한 사진을 보면 괜히 어떤 장비를 썼는지 부터 확인하고 싶어지고, 수백만원을 들여서 좋은 장비를 갖추고 나면 정말 엄청난 사진을 매일 찍어 댈 것 같은 그 마음 말이다. 결국 통장에 남은 돈을 긁어 모아 갖고 있던 장비를 업그레이드 하고 사진을 찍어 보지만, 결과물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복잡한 기능을 다 익히기도 어렵고 무겁기만 하고 괜히 조작만 어려워진 느낌이다.

이런 거 집에 하나씩은 다들 있잖아요

연구를 할 때도 비슷한 욕구와 욕망이 생긴다. 같은 연구문제를 다뤄도 더 어렵고 복잡한 ‘방법’을 쓰면 내 연구가 더 멋져 보이고 더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새로 나온 최신 수학 이론과 요즘 잘 나가는 컴퓨터 이론을 쓰면 내 연구를 더 빛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이고 마음을 빼앗긴다.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은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이지 고급 장비를 쓰는 것이 아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비싸고 좋은 카메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그리고 사진을 찍는 목적에 맞는 카메라와 장비가 필요하다. 어두운 실내에서는 그에 맞는 장비가 필요하고, 풍경을 찍을 때와 인물을 찍을 때는 필요한 장비가 다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의미 있는 순간을 찍으려면 폰카메라 처럼 작고 휴대 하기 편리한 카메라가 필요하다.

연구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질문에 답을 하고 싶은 건지,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가 첫번째로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이지, 최신 방법론을 쓰는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궁금하던 물음에 적합한 답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답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방법이 최신의 것인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아주 오래된 평범한 것인지는 그 다음 문제다.

박사학위로는 부족하다(원제: A PhD Is Not Enough!)’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을 가진 책에서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신기술, 난해한 테크닉, 새로운 시약, 새로 동정한 미생물 등을 이용하여 연구를 수행하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인 연구생산성이나 생존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기술지향적(technic-oriented)인 것보다는 문제지향적(problem-oriented)인쪽이 훨씬 유리하다. ‘문제지향적’이란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과학적 과제를 명확히 세운 다음, 때로는 기술을 새로 배우거나 개발해야 하더라도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기술에만 관심을 쏟으며, 이 기술이 적용될 수 없는 과학적 문제는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술지향적 연구자는 학문적 리더로 오랫동안 살아남을 확률이 거의 없다. 문제지향적이라고 해서, 문제해결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당신은 학문적 리더가 되고자 하는 것이지 기술적 리더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마다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 기술을 응용해서 연구를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리는 곧잘 “내 기술로 이젠 또 뭘 손대볼까?”하는 식의 나쁜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표현해 주었다. ‘장비병’에 걸린 사진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한 기계설비를 만드는 업체에서 기계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미세한 소음을 잡지 못 해 애를 먹고 있었단다. 국내 유수의 전문가들에게 이 어려운 문제 해결을 부탁했더니 음향 분석, 영상 분석, 진동 분석, 열 해석 등의 기술을 동원해 그 원인을 찾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해외에서 주목받던 최신 신기술로도 해결을 못 해 전전긍긍하다가, 일본의 한 전문가에게 부탁을 했고,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 전문가가 한국의 그 업체에 사용한 도구는, 놀랍게도 청진기였다. 소음이 나는 곳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청진기로 소리를 들어가며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지 찾아낸 것이다. 사용한 도구는 고급 도구가 아니었지만,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도구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연구방법과 신기술은 여전히 중요하다. 훌륭한 연구 결과물은 새로운 연구 방법론 개발 혹은 새로운 연구 방법론의 응용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로 연구자들이 기술지향적인 접근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연구 주제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방법론 개발 및 응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예 새로운 연구 방법을 만들든, 아니면 다른 연구 분야에서 개발된 연구방법을 가져다 응용을 하던 말이다. 좋은 연구 주제는 여려 가지 상황 변화로 인해 새롭게 나타나고 발견된 문제이거나, 보편성을 가지고 널리 알려진 문제이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문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문제이므로 자연스럽게 그 문제에 적합한 방법론 개발이 필요하다. 아예 바닥부터 새롭진 않더라도, 새로운 문제에 맞는 변형이 필수적이다. 보편성을 가진 문제는 이미 수많은 연구자가 다루었던 문제이므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려면 새로운 연구 방법을 개발하거나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경우에는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사용했더라도 여전히 기술지향적이 아닌 문제지향적인 접근이다.

물론, 연구에는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문제지향적인 접근이 기술지향적인 접근보다 항상 낫다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러하단 말이다. 기술지향적인 접근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연구 결과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말이야, 새로운 기술이 세상에 나왔길래,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한 번 내 연구 주제에 적용시켜봤지. 그랬더니 있자나, 헐, 대박” 이런 경우 말이다. 깜짝 놀랄 만한 연구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론은 “뭐, 재밌긴 한데, 잘 안 되네”일 가능성이 높다. 저런 넘치는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박사과정 학생의 중심 연구 주제로 삼기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보통 이런건 교수들이 석사 학생에게 시킨다. 아 미안.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기교가 끝나는 순간 예술이 시작된다.”

클래식 음악 예술계의 누군가가 한 말인 것 같다.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기교를 익히고 익혀서 완전히 능숙하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예술을 표현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이해한다. 기교를 완전히 마스터 하지 않고서는 예술가가 될 준비도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연구에도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좋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연구 방법을 확실히 마스터 해야 한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거치면서 필요한 기초 수업들에 나오는 내용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진다.

기교를 마스터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한 위의 말은,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기교 자체가 예술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술을 위해서는 기교가 필요하지만, 기교가 예술의 본질은 아니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물음에 답을 하고자 하는 지이지, 어떤 새로운 기술과 방법을 썼다는 사실이 아니다. 최신 기술을 사용해서 연구를 하는 경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이지 최신 기술을 사용해 봤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기술이 연구의 본질이 아님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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