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아주 중요하다. 대학원 생활에서 ‘연구’라는 측면 하나만 놓고 본다면 필자의 이번 시리즈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대학원생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 근로자(knowledge worker)라면 누구나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대학원에 갓 입학한 분들이라면 이것이 별로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연차가 올라가서 연구 경력이 쌓이고, 사회에 나와서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면서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게 될 것이다. 사실 필자는 지금도 이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잘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번 글은 조금 길지만 찬찬히 읽어보기 바란다.
생각해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먼저 독자들에게 한 번 질문을 해보겠다. 어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떠올려보자. 지난 한 주를 통틀어도 상관없다. 그중에 내가 그 누구의 방해도,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실험을 하거나, 발표 슬라이드를 만들거나, 논문을 읽거나, 논문을 쓰거나, 운전을 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된 채 온전히 나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서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 말이다.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연구라는 것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무슨 문제를 풀 것인지를 정의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접근할 것인지, 그러한 방향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가설, 논리와 근거가 필요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항상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은 모두 ‘생각’ 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안 하고 산다는 말인가요?”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머릿속이 백지장인 채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저것 되는대로 떠오르는 잡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연구에 집중해서 몰두하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고 나무와 숲을 모두 보는 생각을 말한다. 실험을 하거나, 논문을 쓰거나, 논문을 읽거나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생각만을 하는 시간이다.
흔히 하는 착각은 아래의 세 가지 시간이 모두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 연구실에 앉아 있는 시간
- 연구를 하는 시간
- 생각을 하는 시간
연구실에 앉아 있다고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구는 또한 연구실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다. 연구실에 앉아 있다고, 연구를 진행한다고 해서 꼭 반드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세 가지는 동일할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경우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대학원에 있으면서 너무도 많은 것에 쫓긴다. 연구 내적으로나, 연구 외적으로나. 어찌 보면 느긋하게 앉아서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랩 미팅, 팀 미팅, 저널 클럽 등 수많은 미팅에 참석해야 하고, 다음 주면 교수님께 당장 보여드려야 할 데이터와 발표 슬라이드, 과제 보고서를 써야 한다. 교수님께 내가 연구실에 그냥 앉아서 시간만 보내면서 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려야 하니까. 일단 뭐라도 보여드려야 하니까.
이렇게 하다 보면 한 달이 금방 가고, 1년이 정말로 금방 간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너무도 멀리 떠내려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이미 늦다.
스스로를 한 번 되돌아보자.
지금 이렇게 되는대로 떠밀려 다니면서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연구를 진행하면서 내가 그 흐름 속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여유를 가지고,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 당장 하나의 데이터를 더 뽑아내고, 발표 슬라이드 한 장을 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정작 중요한 연구의 흐름과 의의, 큰 그림을 놓치고 있어서는 지금 당장 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연구의 흐름과 의의, 큰 그림이라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아래와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 현재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흐름, 상태, 방향에 대한 고민
-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의 중요성, 해결 방법과 이를 검증하기 위한 논리의 타당성
- 원 데이터(raw data)를 분석하기 위한 가설과 분석 방법
- 데이터와 분석 결과가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가
- 그 결과를 어떤 방식(그래프, 표)으로 보여줄 것인가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대게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내가 풀고자 하는 문제를 선정하고, 가설을 세운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고, 논리를 위한 데이터와 근거를 만들어낸다. 이 데이터를 분석하여 가설을 검증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결론이나 발견을 하고, 혹은 새로운 가설을 세운다. 이 전체 과정에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깊은 사고와 통찰이 필요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서, 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 어떠한 논리와 방향으로 이 데이터를 분석해야 가장 효과적일까. 내가 얻은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표면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것 이외에 내가 무엇인가 놓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그 어떤 것이 있지 않은가? 이 데이터에서 얻은 결론을 바탕으로 그다음에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더 세부적으로는 매우 재미있는 데이터를 얻었는데, 이를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린다면, 혹은 표를 그린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까. 실제로 동일한 데이터와 결론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를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표현할지에는 매우 큰 자유도가 존재한다. 좀 과장하자면 이 부분을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따라 논문의 impact factor가 바뀌기도 한다.
사람은 동일한 데이터를 보고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대가’ 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데이터와 현상을 보면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면 좋은 과학을 할 수 있다. 좋은 데이터를 얻고서도 충분한 의미부여와 (좋은 의미로) 포장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 연구 결과가 주목받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도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에 온전히 집중했을 때가 언제이던가?
생각을 넘어, 몰입하라
생각한다는 것을 넘어서 몰입을 할 수 있으면 좋다. 몰입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이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몰입이 어떤 것인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어떤 주제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서, 주위의 환경, 시간, 어떤 경우에는 나 자신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태가 되면 묘한 희열과 흥분, 그리고 엄청난 효율과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 완전히 몰두해서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 순간 시계를 보면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타임슬립을 한 것처럼 오랜 시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버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몰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내가 몰입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일과 연구가 잘 될 때에는 자신도 신나서 몰입이 저절도 되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서 빨리 연구실에 가고 싶고, 잠을 자면서도 연구 생각을 한다. 꿈도 연구하는 꿈을 꾼다. 오히려 연구에 대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정도다.
일이 잘 되기 때문에 몰입이 되는 것인지, 혹은 몰입이 되기 때문에 일이 잘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 둘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고, 상승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몰입에 관련해서는 서울대 황농문 교수님의 ‘몰입: Think Hard’ 등의 저서를 읽어보라. 이 책에서 나오는 모든 방법론에 동의하거나 따라할지의 여부는 독자들 개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몰입에 대해서 황농문 교수님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상당히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으며, 참고할 부분도 많다. 몰입(flow)이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처음 제시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저서들도 읽어보면 좋다.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라
하지만 현실적으로 몰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몰입은커녕 내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하게 혼자 있을 시간도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결국 단 한 가지. 생각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내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몰입이 잘 되는 환경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는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누구든 과거에 스스로도 놀랄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나, 연구에 대해서 중요한 통찰력을 얻었거나,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시간, 그 장소, 그 상황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자.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상태로 들어가는지를 스스로 파악해보자.
필자 개인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상황에서 생각에 잠기고 몰입이 되고,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유는 모른다. 뭔가 뇌와 관련된 심오한 과학적인 원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원리보다 ‘생각에 잠기게 된다’는 결과이다.
- 아침에 샤워할 때: 샤워를 하는 도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불을 끄고 샤워하는 경우에 더욱 효과가 좋았다. 아마도 오감 중에 시각이라는 한 가지를 차단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학원 시절 기숙사에 살면서 공용 사워 실을 쓸 때에는 불을 끄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필자가 따로 집을 얻었을 때 가장 좋았던 부분이 이 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필자는 불을 끄고 샤워했다.
- 걷거나 산책할 때: 아침에 연구실로 출근하면서 걸어가는 조용한 길이 생각하기에도 좋았다. 뭔가 생각이 계속 떠오르면, 그 생각을 이어가기 위해서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요즘에도 생각이 막히면 무작정 걸을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에 생각을 위해서 걸을 때의 속도는 매우 느리고, 겉으로 보기에도 좀 이상할 수 있다. 내가 기업 연구소에 근무하던 시절, 생각하기 위해서 연구소 뒤쪽 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데 이를 본 다른 직원이, ‘팀장님 어디 안 좋으세요?’라고 물었던 적도 있다.
- 화장실에 있을 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앉아 있으면 치 x의 원인이 된다)
-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필자는 대학원 시절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매주 포항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탔다. 2시간 정도 걸리는 그 시간이 연구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매우 중요했다. 스마트폰, 랩탑도 없던 시기여서 그 버스에 있는 동안은 완전히 제한된 공간 속에서 내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옆자리에서 크게 노래를 듣는 사람이나, 버스에서 텔레비전을 틀어주는 폭력적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3M 귀마개를 구비하고 다녔다. 귀마개는 지금도 내 가방 속에 항상 준비되어 있다.
- 지하철 역에 서 있을 때: 생각하기에 특히 좋은 시간이다. 이때 좋은 논문 Figure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아래는 내가 부산의 지하철 역 플랫폼에 서 있다가 떠올린 논문 그림으로, 실제로 퍼블리쉬 하였다.
- 다른 사람의 세미나가 재미없을 때: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세미나를 들을 때가, 내 연구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세미나를 들을 때는 연자에게 집중해야겠지만, 내용이 너무 재미가 없거나, 나의 의사와는 달리 대학원생으로써 어쩔 수 없이 관객 알바로 동원되었거나 할 때에는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내 연구에 대한 생각에 집중해보자. 무엇인가 연구에 대한 내용을 들으면서 한 귀로 흘리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 누워서 잠들기 직전: 꿈을 꾸면서 무의식을 활용해서라도 생각을 유도해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몰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있다면, 반대로 몰입에 방해가 되는 환경도 있다. 몰입은 커녕 생각을 하기 어려운 환경은 내가 대학원 생활을 할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아래의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
-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
특히 나는 생각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 심리적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니터를 꺼놓아도 이상하게 컴퓨터 앞에 있으면 생각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럴 때는 잠깐 산책을 다녀오거나, 연구소 앞 벤치에서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생각을 하고자 했다. 스마트폰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지금도 일할 때면 스마트폰을 꺼두는 때가 많다.
무의식을 활용해라
한 가지 추가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꿈속에서 나의 무의식까지도 활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하다 하다 이제는 무의식이냐” 하고 질려하거나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대학원 시절에 그만큼 절박하고 진지했다. 내가 가진 의식, 무의식을 모두 활용하고 내가 가진 잠재력의 120%를 사용하고 싶었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누워서 잠들기 전에 데이터에 대한 분석법이나, 논리 전개, 논문 그림 디자인 등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실제로 꿈에 문제가 나와서 무엇인가 명확해지기도 한다.
사실 과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자들이 꿈에서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발견했던 사례는 너무도 많다. 케큘레가 벤젠(C6H6)의 구조식을 발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케큘레는 탄소 6개와 수소 6개로 이루어진 벤젠의 구조식을 아무리 해도 만들 수가 없었다. 꿈에 자신의 꼬리를 문 뱀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고서 육각형 링(ring)으로 이루어진 벤젠의 구조식을 발견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대학생 시절에 수업을 듣다가도 교수님들께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더러 있다. 학부 1학년 시절 프로그래밍 입문 수업을 들을 때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김종 교수님은 “코딩하다가 디버깅(프로그램 오류 해결)이 잘 안 되면 밤새서 하지 말고, 그냥 잠을 자라. 자고 일어나서 코드를 다시 보면 해결될 것이다” 고 언급하셨다. 코딩을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경험적으로 이해가 되는 말일 것이다.
디지털 개론 수업을 하셨던 서영주 교수님의 이야기는 더욱 극적이다. 교수님 본인이 대학원 말년 차에 박사 디펜스를 불과 며칠 앞두고 있던 때였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만 디펜스를 진행할 수 있는데, 이 프로그램이 아무리 해도 디버깅이 잘 되지 않았다. 며칠 안으로 끝내지 못하면 다음 학기로 디펜스를 미뤄야 할 판이었다. 며칠 밤을 새워도 버그가 잡히지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다음 학기에 졸업하자.’ 고 포기하고 잠을 청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잠을 잤더니 꿈에서 자기도 모르게 디버깅을 계속하다가 ‘혹시 이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꿈속에서 문제를 발견한 것이다. 벌떡 잠에서 깨어나 실제로 그 부분을 고쳤더니, 마침내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필자도 연구를 하면서 꿈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꿈을 꾸는 도중에 아이디어가 떠오른 경우도 있다. 혹은 잠을 자다가 뒤척이며 잠깐씩 깨는 그 몇 초의 순간에 내가 요즘 고민하는 문제의 답이나 논리의 오류, 예전에 떠올랐다가 잊어버리고 있던 좋은 아이디어가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필자가 출판한 논문 중에 그림 몇 개는 그렇게 자다가 한 밤중에 잠에서 잠깐 깨어난 순간 떠오른 아이디어로 만들게 되었다. 그 원리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짧은 순간에도 내가 가진 화두가 떠오를 만큼 간절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사고 패턴을 파악해라
다음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사고 패턴을 파악해보라는 것이다. 많은 과정에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이 있듯이, 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좋은 인사이트를 얻게 되는 과정에도 패턴이 있을 수 있다.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짜내고, 몰입에 몰입을 거듭하다 보면 내가 어떤 사고 과정의 결과로 그러한 생각이 나오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는 나와 그러한 과정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분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 아이디어는 어떠한 사고의 과정 끝에 나오게 되는가? 내 자유로운 사고와 아이디어의 생성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였는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특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말이다.
예를 들어, 필자의 경우에는 이러한 경우가 있다. 대학원에 가면 보통 저널 클럽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서로 돌아가면서 중요한 논문을 선정하고 이 논문의 내용과 결론, 연구에 사용된 방법, 좋은 점과 부족한 점 등을 토론하는 것이다.
이런 미팅에서는 그 주에 선정한 논문에 대해서 “아… 데이터라면 이런 결론을 내면 대박인데, 왜 저자는 이걸 놓쳤을까?” 혹은 “이런 가설이라면 오히려 이런 데이터가 필요했을 텐데, 아쉽게도 이 논문에는 그게 없네” 하는 식으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토론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거듭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남의 논문이 아니라) 내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서도 무의식 중에, “아… 이런 데이터가 있으면 진짜 대박인데, 아쉽게도 그게 없네” 하는 생각이 저절로 스쳐 지나간다. 내 연구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연구를 대하는 것처럼 제3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드는 생각이기 때문에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생각을 잘 포착해서, 바로 그 데이터를 만들면 된다. 아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디어를 얻고, 그림까지 만들어뒀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필자가 산업계로 넘어오게 되면서 결국 이 주제를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시작할까
지금까지 연구에 있어서 생각하고, 몰입하고, 때로는 무의식까지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조했다. 다소 추상적이고,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스스로 고민해본다고 할지라도, 어떤 문제를 풀고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오로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자.
이 모든 것을 오늘부터 한 번에 시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금씩 실천해보자. 가장 좋은 출발점은 하루의 일과를 생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최소한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샤워하고, 출근을 준비하고, 출근하는 동안만 계속 생각에 집중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진행하는 연구의 전체 흐름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래서 그 맥락 속에 오늘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절대로 아무 생각 없이 관성으로 출근해서, 연구실 책상에 앉은 후에, “자… 이제부터 뭐 할지를 생각해볼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면 페이스북 좀 하고, 인터넷 기사 좀 찾아보고, 커피 한 잔 마시고, 하다 보면 점심시간 금방 오고, 하루가 또 금방 간다. 큰 변화라는 것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 내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가능한 만들어보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분명히 적지 않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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