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했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거나, 갓 대학원에 들어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글은 고년 차 대학원생, 혹은 박사후연구원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바로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어느새 고년 차 대학원생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처음 연구실에 들어왔을 때는 선배들이 마냥 하늘 같아 보였지만, 이제는 내가 그런 선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어떤 선배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할 때다. 그것이 후배 혹은 연구실의 연구 성과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나의 커리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선배의 유무
필자는 학제 간 연구 과정으로 두 개의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동시에 했다. 한 연구실은 우리 학교 개교 직후에 만들어져서 20년이 되어가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이 연구실의 선배 중에 이미 국내외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신 분도 많았다. 반면 다른 연구실은 미국에서 갓 박사후연구원을 마치고 귀국하신 교수님이 시작하신 신생 연구실이었다. 필자를 비롯한 첫 지도 학생들은 연구실을 세팅하면서 들여온 책상과 의자의 포장을 함께 벗겨내기도 했다. 당연히 연구실의 고년 차 선배는 아무도 없었다.
이 두 연구실에서 동시에 연구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구실의 분위기와 문화 등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신생 연구실과 오래된 연구실은 다른 점이 많았다. 내가 느꼈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내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선배의 유무였다.
분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보통 사수-부사수의 관계로 실험을 배우게 된다. 연구의 큰 줄기는 교수님께 지도를 받지만, 실제로 매일 함께 생활하면서 실험을 배우는 것은 선배인 경우가 많다. 사실 실험을 하고 연구를 진행하는 세부적인 스타일은 사람마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학원 신입생의 입장에서는 어떤 선배, 어떤 사수를 만나느냐가 자신의 연구 인생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 신생 연구실에 필자가 합류한 것은 사실 학부생 5학년 (필자는 복수전공을 하느라 학부를 5년 다녔다) 봄이었다. 교수님을 제외하고 필자는 세 번째 멤버였는데, 그나마 두 명의 대학원생도 그 해 들어온 신입생들이었다. 이 연구실에서 학부생 연구참여로 연구를 시작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선배가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자질구레한 부분들까지 일일이 교수님께 물어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에 많은 부분을 스스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필자가 결심했던 것 한 가지는 내가 선배가 되면 후배들을 잘 이끌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제일 아쉬웠던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한때의 후배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선배가 된다. 지금의 선배들도 한때 미숙한 후배 중의 한 명이었다. 선배들의 도움으로 후배들이 성장하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나는 이렇게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는 것이 일종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실도 하나의 작은 사회이며, 그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좋은 선후배 관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선배는 그런 관계를 만들 수 있는 힘과 책임이 있는 존재다.
좋은 선배가 되는 방법
좋은 선배가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자신이 후배였을 때 선배로부터 받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자신이 후배였을 때 받고 싶었던 것을, 내가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에게 해주면 자연스럽게 좋은 선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받기 싫었던 것은 후배들에게 해주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게 단순히 실험 테크닉적인 면이든, 논문을 쓰거나 발표를 하는 방법이든, 아니면 연구실 생활에 관한 것이든 이 황금률에 따르면 크게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선배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사실 매우 많다. 작게는 내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실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다. 박사 후에는 보통 취업을 하거나 박사후연구원으로 해외 등의 다른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자, 그러면 내가 원래 진행해오던 연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연구를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연구라는 것이 칼로 무 자르듯 뚝 잘리는 것이 아니어서, 논문 몇 편 내고, 박사를 취득했다고 해서 내가 그동안 지속해오던 연구가 거기서 절대 끝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제대로 연구를 했다면,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하고 원리를 밝혀내면 낼수록, 흥미로운 새로운 질문이 더욱 생길 것이다. 이건 왜 그렇지? 저건 왜 그렇지? 이걸 이렇게 더 발전시키면 어떨까? 저걸 저렇게 더 연구해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아마 고구마 줄기처럼 새로운 가설과 질문들이 더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취업을 해서, 외국으로 박사후과정을 나가서 이 프로젝트의 맥이 끊겨버리면 너무 아쉽고 안타깝지 않은가.
만약 내가 진행해오던 연구를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후배가 있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나는 내가 애착을 가져오던 일이 끊어지지 않고 후배에게 계승 발전될 수 있어서 좋고, 후배는 백지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면서 연구할 수 있지 않아서 좋다. 후배가 내 연구 주제를 이어받은 후에는 내가 원래 머릿속에 그렸던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건 또 그것대로 좋지 않은가.
또 한 가지의 이점은 내가 연구의 리더로서 지도학생이나 팀원을 이끄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고 해서 갑자기 진정한 박사로서의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수가 되어서 연구실을 차리고, 기업에 들어가 팀장으로 팀을 맡는다고 해서 갑자기 교수 혹은 팀장의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직책을 맡는 것 이상으로, 진짜 연구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연구를 리딩해본 경험이 필요하다. 이런 경험은 부족하나마 대학원 선배로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쌓을 수 있다. 연구실에 있다보면 선배가 되어서도 부사수(후배)를 잘 맡지 않고, 혼자서면 계속 연구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혼자 연구를 하는 것이 논문을 한 편 더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연구실을 차리고 자기 연구팀을 성공적으로 운영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는 장기적으로 그리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교수님 대가 만들기
후배가 성장하도록 도와주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더 장기적인 이점은 연구실에 대물림되는 일종의 유산(legacy)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우리 지도교수님 대가 만들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느 연구 분야든 그 바닥에서 일가를 이룬 소위 대가들이 있다. 네이처, 사이언스에 밥 먹듯이 논문을 내고, 국제 학회에 기조 연자로 초청을 받고, 이 분이 무심코 날린 코멘트 한 마디가 새로운 연구 주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분들은 어마어마한 연구비를 가지고 있으며, 박사후연구원들은 이 대가들의 연구실에 너도나도 들어가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이런 연구실에서는 연구비 걱정을 하지 않고 연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력으로 인정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가의 연구실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 대가들은 처음부터 대가로 태어났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대가로 인정받는 그들도 처음에는 박사후연구원 한 명 없이 신생 연구실을 차린 신참 교수였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 대학에 자리를 잡고 책상을 들여와서 포장지를 벗기면서 첫 번째 대학원생을 데리고 시작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대가인 사람은 없다. 대가는 우수한 연구 성과가 쌓여가면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연구를 직접 진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다. 지도 교수가 직접 실험하고 논문을 작성하지 않는다. 그 교수의 지도를 받아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 연구하고 좋은 논문을 출판하면 그것이 곧 교신저자로 참여한 교수와 연구실의 업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가의 연구실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하나가 있다. 바로 대를 걸쳐서 대물림되는 핵심적인 연구 주제다. 이런 곳에는 대학원생이 졸업해도, 일하던 박사후연구원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자기 랩을 차려서 독립해버린 이후에도 대를 걸쳐서 내려오는 연구 주제가 있다. 그 주제의 연구는 대학원생이 바뀌어도 대를 걸쳐서 내려오면서 계승 발전되게 된다. 대학원생이 새로 들어올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연구 주제로 연구를 해서는 결코 지도교수가 대가가 될만한 연구 성과가 축적될 수가 없다. 이는 교수 본인의 역량이기도 하지만, 그 연구실에서 후배를 키워내는 선배의 몫이기도 하다.
사실 박사를 하고 필드에 나와보면 알겠지만, 해당 분야에서는 어느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박사를 하고 박사후연구원을 했는지가 현실적으로 여러모로 크게 작용한다. 특히, 세부 연구 분야로 가면 그 바닥이 그리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국 내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연구실이 계속 발전하고 연구 성과가 좋아야, 졸업생들도 빛나게 된다. 나만 잘하고 나와버리면, 연구실에 장기적으로 발전이 없고, 이는 나에게도 결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배가 공헌할 기회를 줘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후배를 키우면 될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필자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후배에게 내 연구에 공헌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앞서 자신만의 특기를 가지고 이를 바탕으로 협업을 활발하게 하라고 조언한 바 있다. 협업할수록 연구 성과에 대한 전체 파이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이미 잘 하고 있고, 지속해서 반복해온 일이라면 슬슬 후배에게 기회를 줘보는 것도 괜찮다. 아니면 내가 현실적으로 시간의 제약 등등으로 다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디어나 가설을 후배에게 던져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주의할 점은 후배를 단순히 이용하거나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내 연구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과 그냥 후배를 부려먹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일 수도 있다. 내 연구를 위해서 단순 반복적인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은 후배를 부려먹는 것이지만, 후배가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사고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의 특기를 계발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후배를 성장시키는 일이다. 후배가 내 연구에 기여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여유를 주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후배가 기여한만큼 연구의 결과물에 대해서도 공유하는 것이다. 작게는 (다른 글에서 강조했듯이) 내가 랩미팅 발표할 때의 후배의 공헌이 있었다는 acknowledge를 잊지 않는 것도 그러하고, 더 중요하게는 논문의 저작권, 즉 authorship이다. 내가 준 연구 주제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논문에 대한 후배의 공헌이 나보다 더 클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authorship도 후배가 더 크게 가져가야 한다. 이렇게 후배가 내 연구에 기여하고 성장하면서, 혹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연구를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면 결국 나와도 윈윈하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
필자의 경험
부끄럽지만, 내가 나름 자랑스러워하는 경험 하나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적이 있듯이, 필자가 학부 5학년 때 ‘신생 연구실’에 학부 연구생으로 합류했을 때의 소박한(?) 목표 중의 하나는 SCI급 논문 하나를 내는 것이었다.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1점짜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결과 논문 서브밋까지 하긴 했었지만, 결국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필자의 실력 부족과 함께 또 다른 이유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연구실의 선배 중에 논문을 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박사 졸업을 하고 난 뒤에 연구실에 한동안 계속 머물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한성규라는 학부생이 연구실에 연구참여 학생으로 들어왔다. (자꾸 후배의 실명을 써서 미안하지만, 어차피 PubMed에 들어가면 다 나오니까…ㅋㅋ) 성규는 컴퓨터공학과에서 생명과학과를 복수전공했던 나와는 반대로, 생명과학과에서 컴퓨터공학과를 복수전공하는 후배였다. 즉, 몇 년 전 내가 학부생 연구참여를 시작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이 후배를 보면서 떠올렸던 것이 연구실 선배 하나 없이 연구참여를 시작하던 학부생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진행하던 연구에 성규를 참여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당시 예전에 출판했던 다른 논문의 자그마한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이 연구에서 필요한 요소 중에 내가 굳이 하려면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성규도 할 수 있는 일 같아서 “이 부분은 네가 한번 해봐라. 잘 되면 너도 논문에 이름 넣어 줄 테니까” 하고 맡겨보았다.
그런데 이 녀석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해서, 결과적으로 내 연구를 더 발전시켜버린 것이었다. 나는 매우 기쁘게 성규에게 논문의 공동 제1 저자를 줬다. 그 논문은 Nucleic Acid Research 라는 당시 SCI 임팩트 팩터 7점의 저널에 실리게 되었다. 이는 사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높은 임팩트 팩터였다. (이번에 2016년의 임팩트 팩터를 찾아보니 10점으로 더 올랐다) 더구나 내가 학부생이었을 때의 목표, 즉 SCI급 저널에 논문을 내는 것을 성규는 이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내가 연구 커리어에서 그리 많은 논문을 낸 것은 아니지만, 이 논문은 후배를 성장시키는 논문이었다는 점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논문 중의 하나다.
앞서 나는 ‘역사적 의무’라는 오글거리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선배들에게 이런 지도를 받은 후배는 본인이 선배가 되었을 때 자신의 후배에게도 이런 전통을 물려주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후배는 또 그 후배의 후배에게 그런 선배가 될 것이다. 이런 전통이 생기려면 누군가는 그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만약에 당신의 연구실에 그런 전통이 없다면 당신이 그 시작점이 되면 된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필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운이 좋으면 그 후배가 어떤 좋은 사고를 쳐서 당신의 논문 임팩트 팩터를 더 높여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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