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들어왔다. …이제 어떡하지?

축하한다. 당신은 대학원에 가야 할 충분한 이유도 스스로 찾아냈고, 박사 학위가 가지는 의미도 이해했으며, 좋은 지도 교수님도 현명하게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어엿한 대학원생이 되었다.

시작이 반이다. 그러니 “드디어 대학원생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당신에게 고생문이 훤히 열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웰컴 투 더 헬!” 이라고 조금 과장을 섞어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당신의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가 힘들 것이다. 학부 때 연구 참여나 인턴을 해보지 않았다면 난생 처음 처해보는 환경과 역할, 교수님과의 관계, 선배들과의 관계, 과중한 업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연구 등의 상황과 한꺼번에 마주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내가 주위에서 보았던 바에 따르면, 대학원을 끝까지 마치치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저년차 때 그만둔다.

jdd대학원..아니 마션의 첫문장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음 적응할 때에 대한 팁을 몇 가지 드리려고 한다. 혹은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쉽지 않을 테니 일단 이 악물고 가드 올리고 복부에 힘주고 각오를 단단히 하자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이야기들이 대학원 신입생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서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기를 바래본다.

1년차 때는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학원 신입생 때에는 자신의 연구를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아직 성숙한 연구자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연구에 할애할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여유나 정신적인 여력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대학원 1-2년 차에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 석사를 먼저 하는 경우도 그렇고, 석박 통합과정을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일단 학점을 따서 학위 과정을 수료해야 하니 수업이 있으면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과제나 팀 프로젝트를 적지 않게 내어주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 들어가는 시간, 숙제하는 시간만 하더라도 일과 시간의 상당 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학부 수업의 조교로 들어가야 한다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 필자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조교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학한 학과가 대학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조교를 할 학과가 학부에 없었다) 만약에 학부 조교를 해야 한다면 수업을 준비하고, 숙제나 시험을 채점하는 등의 활동에 피 같은 내 시간을 추가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또한 생명과학과처럼 기본적인 실험 기법을 익혀야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전공이라면, 실험 테크닉을 배우고 숙달되는 것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이런 경우 보통은 도제 관계로 특정 연구실 선배를 내가 따라다니며 (이렇게 도제 관계의 선배와 후배를 보통 ‘사수’-‘부사수’ 라고 부른다) 연구를 보조해주면서 조금씩 어깨너머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초반에는 사수의 연구를 도와주다가 점차 자신의 주제를 얻어서 독립적인 실험을 하게 되는 방식인데, 이 역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또한 연구실에서 파생되는 온갖 잡무들도 (연구실마다 차이는 있지만) 저년차들이 도맡아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청소부터 시작해서, 과제 관리, 각종 서류 작업, (운이 없으면) 교수님의 심부름이나 기타 잡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어진 수업, 숙제, 조교, 시험 배우기, 잡무…를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 중 일과 시간은 지나가고 저녁이 되어 있거나, 어느새 한 주가 지나가고 주말이 되어 있을 것이다. 대학원생들이 밤늦게까지 혹은 주말에 연구실에 남아 있고 싶어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프지만 그때가 아니면 내 스스로 연구할 시간을 가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확보해라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해라’ 고 조언하고 싶지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임은 필자도 잘 알고 있다. 필자도 대학원 신입생 때 논문도 좀 읽고 싶고, 내 연구도 얼른 하고 싶고, 선배들이 다들 하시는 실험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특히 연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다른 지적인 작업과 마찬가지로) 연속적인 시간의 확보가 아주 중요하다. 필자는 이에 관해 피터 드러커가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했던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지식근로자에게는 30분씩 따로 6번 일하는 것은 소용없고, 3시간의 연속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대학원에서, 특히 1년차 때는 수업, 숙제, 조교, 랩미팅, 저널클럽, 각종 연구실 행사에 시간을 쓰다 보면, 연속적인 시간의 확보가 매우 어려워진다. 논문을 좀 읽으려고 하면 처리할 일이 생기고, 실험을 좀 해보려고 하면 수업에 가야 할 시간, 데이터 좀 들여다보려면 랩미팅에 들어가야 하고… 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결코 쉽지는 않고, 이를 위해서 모든 상황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조언은 없겠지만,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너무 무책임한 발언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필자도 신입생 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고백하고 싶다.

필자는 대학원 1-2년 차 내내, 나는 마음껏 달리고 싶지만, 온갖 잡무를 처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달리려고 준비자세를 취할 때마다 또 다른 잡무가 생기면서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그때는 얼른 고년차가 되어서 잡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내 마음껏 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은 시기다.

방학은 연구를 위한 절호의 찬스

신입생 때 ‘연구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는 조언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방학”이라는 절호의 찬스이다. 신입생 때 연구를 조금이라도 진전시키고 싶다면, 방학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기회이다. (이는 비단 신입생 때뿐만이 아니라, 연차가 올라가도 마찬가지이다)

학부생 때 방학은 여행을 갈 수도 있고, 알바를 할 수도 있는 등 자신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설마 대학원생이 되어서 방학을 자유롭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자면 1년 차 여름 방학은 아마도 대학원 생활 처음으로 연구에 내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사실 방학이라고 해서 대학원생들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아침이면 출근해야 하고, 랩미팅에도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크게 바뀌는 것이 있으니, 바로 수업, 숙제, 학부생 조교라는 요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만 없더라도 내가 연속적으로 시간을 확보하여, 연구에 할애할 수 있는 여력은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므로 학기를 보내면서 방학이 되면 내가 가진 시간과 노력을 총동원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자. 연구에 열정이 있다면 방학이 가까워 온다고 좀 더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더 빡세게 연구에 몰입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학기 중에는 논문을 자세히 읽지 못하더라도 나름의 체계를 갖춰서 정리해놓고, 연구에 관한 가설이나 실험 아이디어들도 학기 중에 정리해놓자. 그러면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망설임 없이 바로 내 리소스를 투입하기가 좀 더 용이할 것이다. 필자는 대학원생 때 방학이 가까워 오면, 이제야 내가 그동안 계획해오던 연구를 좀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명이 나던 기억이 난다.

연구실의 인간관계

연구실도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 그리고 사실 매우 특수한 사회이고 왜곡되기 쉬운 사회이다. 연구실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교수님이라는 절대 권력자를 중심으로 연구실은 돌아간다. 하루 종일, 어떨 때는 주말까지 선후배들과 마주쳐야 한다. 선후배 사이에서도 위계질서가 엄격한 곳도 많다.

연구실 구성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대학원 생활에서의 삶의 질을 위해서도, 안정적인 연구의 진행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회 생활이 그렇듯이 가장 큰 고민과 갈등은 불편한 인간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구실 구성원과 불편한 관계가 되면 서로 불행해지고, 연구에도 지장이 커진다.

사실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대학원뿐만이 아니라, 이후 사회에 나가서 직장 생활을 하든, 외국에 포닥을 가든 마찬가지다. 다만 대부분의 대학원생이 대학원에 오면서 학생 신분을 벗어나 작은 사회 생활을 처음 한다는 점, 사회 생활을 처음 한다는 것은 사실 선배들도 마찬가지라는 점, 구성원이 많지 않고 서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낸다는 점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 인간관계가 왜곡되기 쉽다는 점이 위험 요소이다.

실제로 주변의 연구실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선후배, 혹은 동기들 사이에서 사이가 좋지 않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직접, 간접 경험했던 국내외 연구실에는 최소한 절반 가까이 구성원들 사이에 사이가 좋지 않거나,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 곳이었다. 슬프게도 그 작은 사회에서도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나 또라이가 심심찮게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연구실을 그만두는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연구실 별로 분위기가 다르고, 본인의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최소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선후배 사이에서, 학생과 교수 사이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선배가 후배에게, 교수가 학생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의있게 상대방을 대하고, 인간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연구에 대한 진지하고도 프로페셔널한 자세와 순수한 열정도 필요하다. 사실 이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일단 신입생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은 이러한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같은 값이면 회식이나 야유회, 엠티, 대청소 같은 연구실의 행사에도 되도록이면 잘 참여하도록 하도록 권하고 싶다. 필자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즐겨하지 않는 편이어서 (지금도 그렇지만) 회식은 질색이었다. 그래도 가능한 열심히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신입생 때는 연구실이라는 사회에 내가 첫 발을 내딛는 시기이고, 연구자 인생의 처음으로 학문적인 동료들을 가지게 되고, 그 동료들에게 나의 첫인상을 남기게 되는 때이다. 그 동료들은 어쩌면 앞으로 평생 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학문적인 동반자가 될지도 모른다. 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과 처음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보자.

허드렛일도 중요하다

연구실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신입생들이 연구실에서 실험을 위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청소는 기본이고 실험에 일상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준비들을 하는 것이다.

생명과 연구실을 예로 들자면, 세포를 배양할 수 있는 배지를 만들거나, 많이 사용되는 시약이 부족하지 않게 만들어서 보충해 놓거나, 실험 폐기물이 모이면 정해진 곳에 버리거나, 실험 기기를 관리하는 것 등이다. 컴퓨터 공학과 연구실이라면 서버 유지 관리 같은 것들이 그러한 활동일 것이다. 어떤 연구실은 이를 위해서 테크니션이나 알바를 따로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실은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으므로) 내부 인력을 통해서 해결한다.

이는 사실 귀찮은 일이다. 연구를 위해서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고 하다. 하지만 좋게 보자면 이 또한 실험의 기초가 되는 일이므로 장기적으로는 피가 되고 살이 될 수도 있다. 만약에 내가 박사를 하고 포닥을 한 다음에 드디어 내 연구실을 차리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완전히 새로운 연구실을 세팅하기 위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것들도 알아야만 할 것이고, 새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 하찮은 허드렛일 등을 등한시하고 익히지 않았다가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왠지 변명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허드렛일을 피할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좋게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하자.

 

이번 글을 쓰다 보니, 왠지 핵심은 건드리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이야기를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앞서 언급했듯,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처음 적응하기란 꽤나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첫 연구 주제를 어떻게 정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원래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이 주제인데.. 글이 길어지다 보니 별개의 포스팅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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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의 연구 이야기를 시작하며

대학원생 시절, 연구는 나의 모든 것이자 나의 삶 자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데드라인에 항상 쫓기면서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았고, 연구 결과 하나에 울고 웃었으며,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실험이 계속해서 잘 안 될 때면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가도, 또 내 가설이 맞는 것으로 나오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새벽 메일함을 열었을 때, 내 첫 번째 논문의 개제 허락 메일이 도착했던 순간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무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개제 거절과 세 번의 리비전을 거친 뒤였다.

나는 그 여정에서 많은 빛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인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천재들이었다.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대학원이라는 기간을 불운하고 불행하게 보내었고, 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다른 길을 가기도 했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꼽자면 역시 대학원 시절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의 대학원 시절은 많은 역설과 복잡다단한 애증의 감정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힘든 시기였고, 가장 비효율적인 시간이었지만 또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다. 그 모든 과정을 다시 밟아보라면 지금은 엄두도 못 낼 것 같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다.

나의 대학원 생활

나는 결코 특별하거나 누구에게 내세울 수 있을 만큼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대학원 생활을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표준적인 대학원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대학원생만큼 신분이 어중간하고, 역할이 불분명하며, 앞날도 불투명하고, 해야 할 일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도 없다. 아마 대학원생들의 수만큼이나 특수한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내/국외, 분야, 학과, 세부 전공, 연구 주제에서 개별 교수님의 특성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대학원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 설명할 소위 ‘대학원 연구 노하우’라고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어떤 분야의 연구를 진행했는지를 대략적으로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국내의 이공계 대학교와 대학원을 나왔다. 포항공과대학교 학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했으며 (그래서 학부를 5년 다녔고, 평점은 평균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같은 학교 대학원의 시스템생명공학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생 대학원에 1기로 입학했으며, 내가 1호 박사였다. 그만큼 고생을 했다).

생명과학과 컴퓨터공학의 중간 즈음에 있는 전산 생물학이라고 하는 분야를 전공하면서, 전통적인 생물학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코딩, 시뮬레이션, 데이터 분석을 모두 했다. 지도 교수님도 두 분의 교수님께 공동으로 지도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 설명할 연구에 관한 내용들도 대부분 이런 분야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다.

다양하고 잡다한 연구 경험

이것이 내 대학원 생활이지만, 내 ‘연구 인생’을 이야기하자면 사실 조금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내가 한 가지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내가 비교적 다양한 환경에서 연구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아래는 내가 지금까지 거쳐왔던 연구 조직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것이다.

– BRIC 생물학정보센터 생물정보학 팀
–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남홍길 교수님 연구실
–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김상욱 교수님 연구실
–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류성호/서판길 교수님 연구실
– Stanford University, Department of Chemical & Systems Biology, James Ferrell Lab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 정준호 교수님 연구실
– KT종합기술원 바이오메디컬 인포매틱스 팀
–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 연구중심병원
– 최윤섭 디지털 헬스케어 연구소

포항공과대학교는 학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학부생들도 연구실에 들어가서 연구 참여를 해야 하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논문도 써야 한다. 나는 학부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BRIC 의 생물정보학 팀에 들어가서 연구라는 것을 시작했다 (생물학 관련 전공자라면 BRIC이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2003년에는 내부에 자체적인 연구 조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원 연구실, 기업 연구소, 병원에서 연구했으며, 식물학, 생물학, 생물정보학, 의학을 연구하는 곳을 거쳤다. 순수 연구와 사업개발을 위한 응용연구를 했으며, 한국과 미국에서의 연구 경험이 있다. 학부생, 대학원생, 연구교수, 팀장, 연구소장 등으로 다른 사람 아래에서, 혹은 내 팀원 들을 이끌며, 현재는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역할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다양한 주제를 연구했다. 많은 조직을 옮겨 다니기도 했고, 그만큼 줏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렇게 여러 형태의 조직에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연구를 했다. 때문에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이야기를 조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연구 노하우” 슬라이드

마지막으로 내가 이 ‘연구 노하우’ 집필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이야기해야 하겠다. 바로 ‘연구 노하우’ 슬라이드다. 아마 대학원에 있거나, 대학원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슬라이드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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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라이드는 원래 내가 우리 연구실 후배들을 위해서 만든 자료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포항공대 시스템생명공학부에 1기로 입학한 대학원생이었고, 우리 구조생물정보학 연구실 (김상욱 교수님)에서도 첫 번째 박사 졸업생이었다. 이 연구실은 교수님이 처음 학교에 부임하시면서 연구실을 차리실 때 나도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이후 학부생-대학원생-박사후연구원 시절을 거치며 총 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었던 정든 곳이다.

나는 이 연구실을 떠나는 첫 박사 졸업생이었다. 보통 연구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 랩 미팅은 Farewell Seminar라는 것을 한다. 그동안 내가 연구실에 머물면서 했던 연구와 생활을 돌이켜보고, 랩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감사의 이야기도 전하는 기회이다. 나는 내 Farewell Seminar에서 내가 그동안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생각했던 연구에 대한 나의 개똥 철학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가 없더라도 남아 있는 후배들이 계속 잘 연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슬라이드였다. 그리고는 이 슬라이드를 내 하드디스크 속에 처박아두고 1년 넘게 까먹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오래된 슬라이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자료를 슬라이드 공유 사이트인 슬라이드 쉐어 (slideshare)에 올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슬라이드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공유, 공유, 공유, 또 공유되었다. 나는 사실 처음에는 그 슬라이드가 그렇게 화제가 되는지 몰랐다. 처음에는 내 메일 주소나 트위터 아이디 등 아무것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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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구 노하우는 (개정 증보판까지 합치면) 70만 번 정도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페이스북에는 5만 번 이상 공유되었고 말이다. 혹자는 ‘슬라이드 계의 강남스타일(…)’ 이라고도 했고, ‘한국의 대학원생이라면 한 번은 봤을 슬라이드’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소셜 네트워크의 위력을 몸소 실감한 기회이기도 했고, 이를 통해서 많은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우연한 기회에 업로드한 내용이지만, 나 역시 많은 애착과 보람, 그리고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주의사항!

사실 이렇게 대학원 생활이나 연구에 대한 노하우라고 해서 결코 거창할 것은 없다. 대학원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어떻게든 지나갔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내용이다. 나 역시 실험이 끝나고 실험실 형들, 누나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면서 많이 묻고 또 많이 들었던 내용들이다.

무엇보다 이 내용들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최소한 대학원 시절의 나에게는 꽤 효과적이었던 내용이지만, 현재의 당신에게는 해당되는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결코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대학원생은 각기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하는 조언들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선별적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또한 이 연구 노하우들은 나라고 항상 실천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고, 연구의 신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내 주위만 하더라도 나보다 연구 성과가 좋은 정말 후덜덜한 사람들이 많다) 이 노하우들은 연구가 가장 신나고 잘 되고, 스스로 신명이 나던 시기에 나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들일 뿐이다.

특히 연구가 잘 풀리지 않던 때는 이런 원칙을 의식적으로 더 실천하려고도 했고 말이다. 사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부분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마 그런 노력은 내가 연구를 업으로 삼는 이상은 평생 계속되리라 생각한다.

서론이 길었다.
그럼 다음 글 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다.

* 블로그 내용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책으로 발간하였습니다. 리디북스,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반디앤루니스 등의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종이책/전자책 구매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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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혼자 일하지 마라

이번에는 대학원생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가져야 할 자세와 몇 가지 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특히 이번에 논의하고자 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일할 것인가, 즉 협업(collaboration)과 공동연구에 관한 내용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 일할 수 없다. 이는 일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연구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물리적으로 연구실 내에서 팀을 이루거나, 지도교수-지도학생 혹은 사수-부사수 관계를 맺고 일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연구실 간에 협업을 하거나, 다른 학교 사이에서 혹은 학교와 기업 간 공동 연구를 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 같이 연구 분야별 경계와 장벽이 허물어지는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다. 좋은 저널에 나오는 논문을 몇 개만 유심히 보면 알겠지만, 논문의 저자가 한 명, 혹은 (교신저자까지 포함하여) 두 명인 경우는 근래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의 수가 10명을 넘어가는 경우도 많고, 저자들의 소속을 찾아보면 전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하나의 논문을 쓰는 경우도 많다.

즉, 좋은 연구는 많은 경우 여러 연구자들의 협업을 통해서 완성된다. 한 명의 연구자가 모든 것에 전문성을 가지기 어렵고, 학제간 연구가 향후 더욱 활발해질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공동연구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공동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 스스로가 전문가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려 깊은 프로페셔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신만의 특기를 개발하라

우선 좋은 공동연구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연구라는 것은 서로가 상대방이 가지지 않은 전문성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하는 것보다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에서 무엇인가 나은 부분이 있어야 한다. 즉, 내가 전문성이나 특기를 가지고 연구팀에 기여할 수 있어야만 공동연구라는 것 자체가 성립한다.

대학원생 입장에서 전문성이나 특기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최소한 “이 주제, 이 기술만큼은 내가 국내에서는 최고다” 정도는 되어야 한다. 국내 정상급 실력자가 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주 인기 있는 분야를 제외한다면) 구체적인 세부적인 주제에 대해서 연구한다면, 좁은 국내 바닥을 통틀어도 연구팀이나 연구자의 총 수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인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는 당연히 수위에 있어야 한다.

또한 굳이 ‘세계 최고’를 기준으로 하지 않은 점은 너무 어렵거나 또 막연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에서 내가 어느 수준인지는 1년에도 여러 번 열리는 학회나 포스터 발표 정도만 보더라도 감이 오는 경우가 많다. 비교 대상을 보고서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

그렇다면 무엇을 특기로 해야 할 것인가? 연구실과 연구 주제를 정할 때에도 필자가 강조했던 것이지만, 무조건 자신이 재미있고, 하고 싶고, 열정이 있고, 평생 공부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주제를 골라야 한다. 그것이 특정 기술이든, 특정 주제이든 장기적으로 본인만의 키워드를 잡고 공부해나가야 한다.

대학원생이 해당 주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본인의 논문을 펑펑 써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최신 논문이 어떻게 나왔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 팀은 누가 있고, (논문으로 아직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이 다음번에 연구가 발전되어갈 방향이 어디인지는 맥을 잡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인의 실력도 발전시켜나가야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자신의 논문도 쓸 수 있다.

얼마나 재미있어야 하는가

자신이 ‘재미있는’ 연구 주제를 골라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재미있어야 할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연구실에 빨리 출근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정도여야 한다. 어제 못 다 읽은 논문이 너무 재미있고, 후속 연구에서 어떤 식으로 해당 주제가 발전되어 갈지 너무도 궁금한 것이다. 내가 어제까지 실험하던 결과가 오늘 어떻게 나올지, 내가 세운 가설을 빨리 검증해보고 싶고, 내가 이 분야에 의미 있는 기여하는 것이 전 세계 연구자 커뮤니티에 속한 일원으로 자랑스러울 수 있는 주제를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변태 같은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연구자 생활을 하면서 신기하게도 내가 존경하고 좋은 연구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서 이와 관련된 공통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모교인 포항공대 교수님이나, 잠깐 연구했던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님들,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에게서도.

나는 2003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로드릭 맥키넌 교수님께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러 포항공대를 방문하셨을 때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박사 수여식이 끝나고 당돌하게 학생 몇 명이서 “박사님, 포항공대 내에 통나무집이라는 맥주펍이 있는데,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저희 학생 몇 명과 함께 맥주 한잔 하시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당돌하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통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맥키넌 박사님께 ‘위대한 과학(great science)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박사님은 우문에 현답으로 답하셨다. ‘위대한 문제(great problem)를 찾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본인은 자신의 흥미를 찾아서 그 위대한 문제를 찾으셨다고. 내가 ‘박사님은 지금도 연구가 즐거우세요?’ 라고 물었더니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지금도 매일 아침 연구실에 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우리도 그런 문제를 찾아보자. 우리라고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남들과 차별화하라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유니크한 특기를 가지면 좋다. 앞서 ‘국내에서는 최고’ 라는 기준을 제시했고, 세부적인 주제에 대해서라면 국내에서 연구 팀이 사실 몇개 없는 경우가 많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만약에 해당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국내에서 본인밖에 없다면, 당연히 내가 국내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는 연구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직장인이나 기업 수준에서도 통하는 조언이다. 경영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경쟁자와 차별화(differentiation)할 수 있을지가 핵심이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나 역할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역량, 혹은 계발하고 배우고 있는 역량 중에 그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항상 던져야 한다.

유니크한 특기를 가진 사람은 조직에서 대체 불가능(irreplaceable)하다. 그 특기가 조직에서 유용하고 필수적인 요소라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유용하고 필수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유니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대체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전문가들조차도 대체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이는 다른 전문가들과 차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별화되는 전문성은 공동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연구실 내에서, 혹은 연구실 간에 차별화된 특기를 저마다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자연스럽게 공동연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행하는 연구에서 상대방의 특기인 부분이 있다면 그에게 맡기고, 그가 진행하는 연구에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그 부분은 내가 해결해준다. 그리고 그 과실은 서로가 공유한다. 자신만의 특기가 있다면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기가 쉽다. (만약 나와 상대방이 모두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같은 값이라면 후배에게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이것은 다음 글의 주제이다)

내가 모셨던 PI 중에 한 분은 항상 “두 사람이 각각 논문을 한 편씩 쓰지 말고, 두 명이서 함께 논문을 세 편 써라” 고 강조하셨다. 이것이 바로 시너지 효과이며, 우리가 팀을 이뤄서 연구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너지 효과는 각자가 서로 차별화된 특기를 가지고 있을 때에 일어날 수 있다.

프로페셔널의 제1원칙: 기브 앤 테이크

자신만의 특기를 바탕으로 공동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동연구를 이제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 필자는 공동연구에 있어서 한 가지 원칙을 강조하고 싶다. 바로 “상대에게 어떻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라” 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타적인 자세가, 결국 나 자신에게도 더 큰 혜택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프로페셔널의 제1원칙은 바로 기브 앤 테이크이다. 말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주고(give), 받는다(take)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에 대해서 “내가 도움을 줬으니, 이제는 당연히 나도 네 도움을 받아야 해”, “지난번에 네가 나한테 빚졌으니, 이번에는 당당히 네 도움을 요구할 권리가 있어” 정도로 이해서는 곤란하다. 프로페셔널들 사이에서 기여는 돈을 빌리고 갚는 것과 같은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기브 앤 테이크’란 상대방에게 먼저, “혹시 뭐 필요한 것 없니?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줄게” 하고 ‘먼저’ 다가가는 것을 말한다. 즉, 향후에 테이크할 것을 바라지 않고, 우선적으로 먼저 기브하는 것이 프로페셔널의 ‘기브 앤 테이크’이다. 당장은 나에게 과실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어도, 장기간에 그 기여의 고리가 돌고 돌아서 결국에는 과실이 나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생각해보라. 모두가 이렇게 “뭐 필요한 것 없니? 내가 도와줄게” 라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연구실, 연구팀, 조직을 생각해보라. 그런 이상적인 조직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필자는 그런 연구실에서 연구를 했던 행복한 경험이 있다.

사실 아직 철들지 않은, 연구자로서는 미숙한 대학원생들이 이러한 자세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 못지 않게, 지도 교수나 PI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실 아기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듯, 대학원생은 교수의 사소한 모습까지도 보고 배운다. 교수라면 이러한 이타적이고, 기브 앤 테이크가 잘 작동하며, 결과적으로 장기적인 시너지가 창출되는 조직을 목표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좋은 연구 성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그렇다고 학생들이 교수 탓만을 해서는 곤란하다)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는 경영학적으로 연구도 많이 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은 사람은 애덤 그랜트의 ‘기브 앤 테이크’ 라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주고 싶어 하는 기버(giver)가 왜 ‘주는 만큼 받는’ 매처(matcher)나,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테이커(taker)보다 왜 더 성공적인지에 대해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오리지널스’로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애덤 그랜트의 전작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오리지널스보다 이 책이 더 좋았다.

연구자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라

어른들은 흔히 ‘일만 잘하면 뭐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말을 하시곤 한다. 필자는 이 말씀이 공동연구에 있어서는 핵심을 꿰뚫는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수정하자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공동연구도 잘할 수 있다’ 정도로 이야기 하고 싶다.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공동연구는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가장 큰 기쁨도, 가장 큰 아픔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온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업무적으로도 그렇다. 공동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실력이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진, 인간적으로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인성이 실력보다도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생각해보라. 다른 사람들이 같이 일해보고 싶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좋은 공동연구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실력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같이 일하기에 즐겁고, 유쾌하며, 서로 학문적으로 토론하기에 좋은 상대이며,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함께 일하고 싶지 않겠는가.

반대를 생각해보자. 주위에는 왠지 좀 재수 없고,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즐겨하는 인간은 실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함께 일하기가 꺼려지게 된다. 나는 특히 뒷담화를 즐겨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뒷담화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그 대상이 되는 것도 싫다. 연구하는 바닥은 매우 좁기 때문에 동료들에 대한 험담은 결국에 그 사람의 귀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에게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자리에 가서 내 험담을 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안타깝지만 이런 사람과 공동연구를 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뒷담화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함과 동시에 연구자로서의 커리어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품평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도록 하자.

결국 평판(reputation)의 관리가 핵심이다. 평판은 연구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하다. 사회 생활에서는 이런 평판에 대한 레퍼런스 체크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만약 나에게 누가 A라는 사람을 소개해줬거나, 나에게 무엇인가 요청하는 콜드콜을 보냈을 때, 나는 이 A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만한 사람에게 레퍼런스 체크를 먼저 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좋은 사람인지를 내가 신뢰하는 분께 여쭤보는 것이다.

만약에 제 3자가 나를 아는 사람에게 ‘이 사람 어떤 사람이야?’ 하고 물어보았을 때 나에 대해서 어떤 평이 나올지를 한번 더올려보라. 이때 “그 사람 한번 만나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예요”, “그 사람 함께 일하기에 좋은 분이예요” 하는 평판이 나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좋은 평판은 억지로 만들거나 관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모습에서 배어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평판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며, 이는 매우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나쁜 평판을 만드는 일은 매우 쉽다. 그리고 한 번 쌓인 나쁜 평판을 없애기란 정말 어렵다.

의도와 범위, 보상을 명확히 하라

연구 초심자로서 공동연구를 시작할 때 조언해주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의도와 범위, 그리고 보상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다. 흔히 한국의 연구실에서는 상하관계가 있고, 교수나 선배들이 소위 ‘까라면 까야하는’ 문화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공동연구에 있어서는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고, 부려먹는다기 보다는 서로 평등한 연구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인이 그럴 마음이 있다면, 공동연구자에게 자신이 공동 연구가 필요한 이유와 이 일을 당신에게 요청하는 이유, 요청하는 일의 범위, 그리고 이를 통한 어떤 보상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하고 진행하는 것이 좋다. 일을 진행할 때 공동연구자가 이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 못하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면 그냥 ‘상대가 나를 부려먹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실 간의 공동연구에서는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는 사람과 실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이 다르게 된다. 이런 경우에 연구의 초기 제안자와 실제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당연한 이야기지만) 결과가 잘 나올 경우에, 논문의 저작권(authorship) 등을 공유할 것임을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공동연구가 수월하게 진행되는 경우,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경우의 차이는 바로 공동연구자가 이 연구에 얼마나 흥미를 가지며 주인의식을 가지느냐에 달려있다. 즉, 내가 제안한 주제라면 나는 당연히 이 연구가 중요하고, ‘내 연구’ 라고 여기게 되지만, 공동연구를 제안받은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공동연구자가 이 연구가 (비록 다른 사람에게서 처음 나온 아이디어지만) ‘내 연구’ 라고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절대 acknowledgement를 잊지 마라

이 부분은 사소한 팁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학회 등 외부 발표에서 뿐만이 아니라, 랩미팅 등 연구실 내부 발표 등 결과 공유를 하는 자리에서 공동연구자 등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은 분들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이러한 도움과 기여에 대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acknowledgement는 발표자료의 가장 마지막 장에 모두 몰아넣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과 더불어서 필자는 해당 슬라이드에 (슬라이드의 오른쪽 하단에) 명시적으로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의 실험 결과를 도출할 때에나, 이 데이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누구에게 받은 것이 있다면, 해당 부분의 발표자료에 (주로 슬라이드의 오른쪽 하단에) 명시적으로 누구의 도움을 받았음을 기록하고, 발표 중에 “이 아이디어는 A가 가장 먼저 제시해주셨습니다.”, “이 실험은 B 연구실의 C 박사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고 밝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공동연구는 결코 나 혼자 진행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를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에서도 나 혼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 부분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또한 흔하게 잊어먹는 일이기도 하다. 의도적이든, 혹은 실수이든 공동연구자의 기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면, 윤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피해를 본인이 입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 유의하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본인이 나쁜 평판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연구실 내부적으로 랩미팅하는 것이고, 모든 구성원들이 내가 A라는 사람과 공동연구를 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내가 말 안해도 다들 잘 알고 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가다가는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A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한 실험의 결과를 보면서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면, 마치 성과를 도둑맞은 것처럼 느끼 수 있다.

“내가 기껏 시간을 내어서 도와줬더니, 자기가 연구 다 한 것처럼 이야기하네? 내가 다시는 저 인간을 도와주나 봐라.” 하면서 속으로 화를 낼 수도 있다.

절대 acknowledgement를 잊지 마라: 나의 경험

이 부분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서 필자 본인의 부끄러운 기억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이 내용은 필자가 슬라이드쉐어에 올린 “내가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연구 노하우” 초판본 때부터 들어 있던 내용이다. 필자 본인도 그 중요성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후 시간이 흘러서 필자가 대기업에서 팀장으로 일할 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우리 팀의 사업기획에 대해서 몇 달간 작업을 하였고, 그 계획에 대해서 처음으로 필자가 팀을 대표하여 임원 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특히 그 사업 계획을 세우는 것과 발표 슬라이드 제작은 기획 전문가인 팀원 한 분께서 담당 하셨다.

내가 대표로 상무님께 슬라이드를 보여드리며 발표를 하였고, 팀원들도 함께 그 발표를 들었다. 몇 달간 준비한 발표이고, 나도 많이 긴장했지만 다행히 나름대로 발표가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표 후 그 기획 전문가께서 “팀장님, 잠깐 이야기 좀 따로 나누실 수 있을까요?” 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팀장님, 어떻게 그 발표를 팀장님 혼자 준비하신 것처럼 말씀하실 수가 있으신가요? 그 슬라이드의 내용은 대부분 제가 만든 것이지 않나요?”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내가 기억을 되살려보니, 내가 발표에서 팀원들이 이러저러한 기여를 했고, 특히 기획안 작성 전체에서 그 기획 전문가 팀원의 기여가 컸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너무 긴장을 했기 때문이든, 연습이 부족했든, 그냥 까먹었든지 간에 그 발표에서 그 팀원은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 지적은 매우 타당했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을 깨달은 나는 그 팀원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결코 공을 내가 독차지하거나, 그분께서 기여한 바를 내가 사소하게 생각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 결국 내가 진심으로 거듭 사과하자 그 팀원께서도 오해를 풀고 화를 거두시기는 하셨지만, 이 실수에 대한 교훈은 지금까지도 내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

내가 나의 부끄러운 경험까지 공개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공동연구자의 기여를 acknowledge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과,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그 노력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쉽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부디 나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프로페셔널하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법

마지막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팁을 몇 가지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는 프로페셔널을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동연구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 중의 하나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의 프로젝트 진행과 시간이 중요한 만큼, 상대방의 프로젝트 진행과 시간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의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시간을 아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방해가 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메일을 보낼 때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다. 상대가 나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에는 단순히 안부 인사가 아니라, 어떤 문제나 이슈에 대해서 나의 의견이나 답을 듣기 위해서 보낸다. 이러한 메일에 대해서 가능한 빨리 답장을 해주자. 내가 답장을 보내줘야만 상대방이 그 답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만약에 내가 답장을 해주지 않고 질질 끌게 되면 그 시간 동안 상대방은 답장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할 수밖에 없고, 이는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차질로 이어진다.

만약에 내가 메일로 받은 내용이 바로 답변을 해주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최소한 언제까지 답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알려주기만 해도, 상대방에게는 크게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이 요청에 대한 실험은 제가 다음주 목요일까지 끝내고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만 보내주면, 상대방이 프로젝트 진행 계획을 세우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만약 이런 말도 없이 그냥 나 혼자 ‘다음주 목요일까지 기다렸다가 메일을 줘야지’ 하게 되면 상대방은 그저 하염 없이 기다리거나, 메일을 못 받은 것은 아닌지 재차 확인을 할 수밖에 없다.

공동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소통하고, 정보를 흐르게 하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가장 힘든 공동연구자는 ‘묵묵부답’인 연구자였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장을 주지 않는다. 그저 본인의 스케쥴대로 (그리고 이 스케쥴에 대해서는 본인만 알고 있다) 연구를 진행한다. 때가 되면 답장과 데이터를 보내주지만, 그 답이 언제 올지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다. 이런 경우는 공동연구를 진행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고 봐야 한다.

이메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자

사실 공동연구에서 이메일만큼 커뮤니케이션에 중요한 것도 없다. 조금 더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부분이지만, 이메일에 대한 팁도 몇 가지 주려고 한다. 경쟁력은 작은 부분에서 판가름 나고, 악마는 디테일에 살고 있다. 보통 상대방이 보내온 메일만 딱 보더라도, 이 사람이 일을 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이메일 한 통을 보낼 때에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 부분은 연구자뿐만이 아니라, 일반 직장인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메일의 제목만 보고서도 메일을 보내는 명확한 의도, 결론, 정보가 담겨져 있도록 쓰자. 연구를 활발히 하는 사람일수록 하루에도 수많은 메일을 받는다. 그 쏟아지는 메일 중에서 중요한 정보를 쉽게 가려낼 수 있고, 또 시간이 흐른 뒤에 상대가 이메일 검색으로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려면 제목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의 예시를 참고하자. 좋은 예시라고 해서 완벽한 것은 아니겠지만, 제목만 보고서 판단할 수 있는 정보, 의도, 목적 등에 크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나쁜 예: “데이터입니다” (무슨 데이터인지 알 수 없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목적을 알 수 없다)
  • 좋은 예” “7월 17일 최윤섭 랩미팅 슬라이드 보내드립니다”, “A연구실 정기 미팅 공지 (7/17 @대회의실)”

또한 첨부파일 제목과 양식에도 신경을 쓰자. 실험 결과나 데이터를 보낼 때에는 첨부파일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이 첨부파일을 받았을 때 어떤 상황이 될지를 상상해보면 쉽게 짐작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데이터가 무슨 실험에서 나온 데이터인지, 누구의 데이터인지, 언제 나온 데이터인지가 파일에 들어 있어야 한다. 메일에는 해당 내용이 있어도, 첨부된 파일의 제목에 그 내용이 없으면, 수신자가 또 그 파일을 찾아서 직접 제목을 고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 나쁜 예: “data.xlsx” , “제목없음.txt” (무슨 데이터이며, 누가 언제 만든 것이 알 수 없다)
  • 좋은 예: “digital_health_global_trends_2017_2Q_최윤섭_170717.pdf”

마지막으로 메일에 답장을 보낼 때에는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체크해라. 특히 참조 수신인(cc)이 있는 메일인지를 확인해라. ‘참조’라는 것은 해당 메일의 직접적인 수신자는 아니지만, 메일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커뮤니케이션 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는 관계자들을 포함시킨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전체 답장’으로 답장을 보내야 한다.

예를 들어, 공동연구하는 연구실의 학생 A가 나를 수신인으로 메일을 보냈는데, 그 연구실의 교수님 B와 우리 연구실의 교수님 C 를 참조로 하여 메일을 보냈다고 해보자. A는 이 메일의 내용과 그 답장에 대해서 교수님 B, C도 알아야 한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메일에 대해서 ‘전체 답장’을 해서 A뿐만 아니라, 교수님 B, C 에게도 역시 참조로 답장의 내용을 공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답장’을 보내면 A에게만 메일이 가기 때문에, 교수님 B, C 는 해당 내용에 대해서 팔로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

 

PS.
쑥스럽지만, 이번에 제가 책을 한 권 출판하게 되어서 이 자리를 빌어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연재하는 글을 읽으면서 ‘근데 저 인간은 뭐하는 사람이지?’ 하고 궁금해하신 분도 계실텐데요. 저는 의과대학 연구소, 대기업, 대학병원 등을 거쳐서 지금은 독립하여 ‘최윤섭 디지털 헬스케어 연구소’라는 1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과 철학,독립하게 된 과정과 구체적인 방법론을 정리하여 “그렇게 나는 스스로 기업이 되었다” 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생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책의 본문에 언급되듯) 저는 대학원생일 때부터 저 스스로를 하나의 기업, 혹은 연구소로 여기면서 연구해왔습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독립적으로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러한 삶과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있다면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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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논문을 최대한 빨리 써라

지난 글에서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첫 번째 연구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고, 그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뤄보았다. 이번에는 그 연구가 진행되어 첫 번째 논문을 쓰는 것의 중요성과 그 방법에 대한 부분을 강조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연구라는 것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새로운 과학적인 발견을 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이전에 인류가 닿지 않았던 미지의 지적 영역을 확장시켜나간다. 알지 못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리를 파악해내고,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는 연구의 결과물은 논문이라는 형태로 귀결된다. 열심히 연구한 결과를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설명한 문서의 형태로 학계에 발표하는 것이다. 보통 논문으로 연구 결과를 출판했다고 하는 것은 연구 결과의 타당성, 중요성과 신규성에 대해서 학계에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제대로 된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꽤나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에서 심사위원(리뷰어)들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연구, 중요하지 않은 연구, 그리고 기존의 연구 대비 새로울 것이 없는 연구 결과들을 걸러내게 된다.

사실 우리가 연구하는 목적을 논문으로 한정 짓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논문은 연구의 결과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연구하는 이유는 보다 숭고하고 위대한 것이다. 하지만 논문은 우리가 하고 있는 연구의 중요성과 가치, 그리고 나의 연구 역량을 증명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대학원생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논문을 내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다.

첫 논문을 무조건, 최대한 빨리 써라

나는 대학원에 갓 입학한 후배들에게 최대한 첫 번째 논문을 빨리 써보라고 조언한다. 되든 안 되든 그렇게 노력을 해봐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논문을 출판하는 전체 과정을 일찍 경험해보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실험을 하는 능력과 논문을 출판하는 능력을 비슷할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매우 다른 영역이다.

보통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은 대학원 생활 내내 실험하고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박사 말년 차가 되어서야 졸업을 해야 하니 그제서야 논문이라는 것을 써보려고 처음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실험에 숙달되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논문을 출판하는 것에도 능숙해지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박사 말년 차가 되어서야 논문을 처음 써보려고 하면, 집필과 출판 과정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입장에서는 이게 한 번에 잘 될 리가 없다. 그래서 졸업은 더욱 기약이 없어진다.

실험을 마무리하는 것과 논문을 마무리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초보 연구자가 으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계획했던 실험이 끝나고 원했던 데이터를 모두 얻었다고 해서 연구가 마무리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부터는 논문의 작성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적은 사람이 상상하는 연구 과정
실제 연구 및 논문 출판 과정

논문 쓰기: 글을 써야 한다.

자. 우리가 열심히 연구해서 원하는 모든 데이터를 얻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 논문을 써야 한다. 같은 실험 결과와 데이터를 놓고도 우리가 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의미부여를 하며, 학계의 동료들을 설득할 것인지는 그 데이터를 얻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서 그 데이터 자체의 의미와 중요성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생 때는 논술고사가 있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나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논문을 쓰는 것도 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나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므로 논술과 비슷하다. 한국의 교육과정을 거친 많은 학생들은 글을 쓰는 것을 어려워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조리 있게 표현한다는 것인데, 우리 교육 과정에서 이러한 부분을 습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교과 과정에서는 객관식 보기 중에 답을 골라내는 훈련을 받지만, 주관식에 서술형으로 답할 기회는 별로 없다. 고등학교 때 논술 고사를 어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에 비춰보면 논문이라는, 논술 고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논리적 완결성, 설득력, 타당성을 지닌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했던 데이터를 모두 얻은 다음, ‘자, 이제 논문이라는 것을 한 번 써볼까?’ 하고 MS 워드를 켜놓고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의 그 막막함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아마도 더 큰 문제는 한글로 써도 어려운 이 글을 영어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학교에서는 졸업 요건으로 SCI 급 국제 저널에 출판하는 것을 요구한다. SCI 급 저널이라면 대부분 영어로 작성해야 한다. 논문에 들어가는 영어는 일반 영어회화에 쓰이는 표현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사실 이 논문에 필요한 영어 표현은 그리 다양하지 않고, 다소 정해진 표현들이 있어서 경험이 쌓이면 좀 익숙해진다. 하지만 역시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와 같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영어를 모국어가 아니라 학교에서 후천적으로 배운 외국어로 사용할 것이다. 그런 경우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어색한 표현이 없을 수 없으므로, 논문 작성 마지막에는 원어민에게 영문 표현을 첨삭 받는 과정을 또 거쳐야 한다.

논문 쓰기: 그림도 그려야 한다.

글을 쓰는 것이 다가 아니다. 논문에 들어갈 그림이나 그래프, 표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논문은 단순히 글로만 내 연구 결과를 설명하지 않는다. 내 결과와 주장을 효과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림과 그래프의 역할이 매우 크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며, 아무리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논문 전체의 컨셉을 보여 줄 수 있는 그림 하나가 더 큰 임팩트가 있다.

같은 데이터를 놓고도 어떤 글을 쓸지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방식이 존재하듯이, 같은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림이나 그래프를 그리는 방식에도 무한히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얻은 결과와 내가 하고 싶은 주장을 좀 더 효과적으로 그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이는 또한 디자인에 대한 예술적인 감각도 필요한 일이다. 논문에 글을 쓰기 위해서 작가가 되어야 한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미술가도 되어야 한다.

논문 그림(figure)을 그리기 위해서는 엑셀 등의 간단한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보다 전문적인 컨셉이나 멋진 그래프를 그리기 위해서 일러스트레이터 등 더 고난도의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과학자이지 디자이너가 아니므로 일러스트레이터 등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선배들의 연구실 책장에 일러스트레이터 책들이 한 권씩은 다 꽂혀 있는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참 쉽죠….?

서브밋과 리비전하기

열심히 글을 쓰고 그림과 그래프를 그려서 논문을 다 작성했다고 하자. 이제는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논문을 저널에 투고(submit)하고 심사위원(reviewer)들에게 심사를 받아서, 논문의 부족한 점들을 수정(revision) 해나가는 과정이다. (투고, 심사위원, 수정이라는 표현보다는 서브밋, 리뷰어, 리비전이라는 표현이 더 일상적으로 쓰이므로 이 표현을 쓰도록 하겠다.)

논문을 서브밋 하려면 무엇보다 어느 저널에 도전해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좁은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주제를 폭넓게 다루는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정상급 유명 저널을 노려볼수도 있고, 보다 더 세부적인 분야를 다루는 저널에 도전할 수도 있다.

저널의 중요도는 흔히 임팩트 펙터(impact factor)라고 불리는 인용지수에 의해서 결정된다. 쉽게 말하면 합격자의 수능 점수에 따라서 국내 대학의 서열이 대략 정해지듯이, 저널들 사이에서도 임팩트 팩터에 따라서 대략적인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일수록 임팩트 팩터가 높아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점수에, 즉 저널들 사이의 등수에도 약간씩의 변동이 생긴다.

논문을 서브밋할 때 보통은 내 연구의 실질적인 중요도보다 약간 높은 저널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안 되더라도 한 번 문을 두드려보자는 마음도 있고, 혹시나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만약 논문의 퀄리티가 해당 저널의 수준에 턱없이 모자라면 저널의 편집자 (에디터)가 며칠 내로 거절(reject) 답장을 준다. 에디터가 이 논문 정도라면 한 번 심사해볼 필요는 있겠다고 하면 학계의 전문가들을 심사관으로 하여 세부적인 검토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만약 에디터가 리젝하든, 심사위원이 리젝하든, 리젝(개제 거절)을 당하면, 이번보다 약간 낮은 저널에 다시 서브밋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혹은 리젝을 당하지 않고, 리뷰어들이 논문에 부족한 점들을 알려주면서 수정(revision) 후 다시 서브밋하라는 연락이 올 수도 있다. 수정을 요구하는 부분은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추가하라는 것부터 단순한 철자 오류에 이르기까지 폭넓고도 다양하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리비전 기간은 보통 두 달 정도인데, 이 기간 동안 다시 보충 실험을 하고, 결과를 얻어서, 다시 논문을 서브밋하면 다시 재심사를 받게 된다. 리뷰어들이 지적한 사항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대응했다면 이제 논문은 수락(accept)이 된다. 반대로 수정한 한 결과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추가적인 리비전을 요구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그렇게 공들여서 리비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리젝을 당할 수도 있다.

간단히 순서도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이론적으로는 서브밋->리젝->서브밋의 무한루프에 갇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한루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한 큐에 서브밋을 하고 리비전이나 리젝 없이 어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리비전도 없이 한 큐에 어쎕되면, ‘에이 한 단계 더 높은 저널에 서브밋해볼껄…’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논문 심사와 리비전 과정의 순서도

특히 리비전을 하는 이 기간이 정말 피를 말린다. 내 논문의 논리적인 허점이나 부족한 데이터를 리뷰어들이 속속들이 지적하고 (특히 내가 숨기고 싶은 약점들을 리뷰어들은 귀신 같이 찾아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데이터를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뷰어의 날카로운 지적에 어떠한 논리와 실험으로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전략도 중요하다. 이런 부분은 상당히 전략적이고 테크니컬한 측면이 있다.

전체 과정을 경험해보기

이렇게 실험을 끝마친 이후에도 논문을 쓰고, 제출하고 리비전을 하는 완전히 새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실험을 할 때와는 또 다른 역량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이는 직접 겪어봐야만 비로소 체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첫 논문을 빨리 써보라는 조언에는 이런 전체 과정을 최대한 빨리 겪어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운 좋게도 이러한 과정을 남들보다 빨리 했다. 학부 때 이미 했기 때문이다. 학부 연구 참여를 하면서 나는 Bioinformatics라는 당시 임팩트 펙터 6점 정도짜리 저널에 학부 졸업 논문을 출판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나름대로 학부 마지막 학년을 열심히 연구해서 논문을 쓰고, Bioinformatics 저널에 내 논문을 서브밋하고, 리뷰어 세명의 심사까지 받았다.

그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리젝이었다. 나는 그 리젝 메일을 받을 때의 그 큰 실망감을 아직 기억한다. 너무도 자세하고 신랄하게 내 논문이 가지는 약점을 지적해놓았는데 당시에는 정말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내상이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보기에도 턱없이 낮은 수준의 논문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학부 때 이렇게 연구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논문으로 쓰고, 리뷰까지 받아보는 경험을 한 것은 나중에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대학원에 있다 보면 이런 경험을 박사 말년 차에나 하게 된다. 그때 가서 이 경험을 하는 것은 너무 늦다.

방귀도 자꾸 뀌어야 똥이 나온다

이런 경험을 빨리 해보라는 또 다른 이유는 연구를 일단락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이다. 진행하는 연구는 어딘가에서 끊고 마무리를 한 다음에 넘어가야 한다. 한동안 연구했던 주제에 대해서 논문을 출판하면서 내 연구의 한 부분을 일단락하고, 후속 연구로 계속 진행하는 것이다. 연구를 잘 마무리하는 것도 실력이며 경험이 필요하다.

연구 결과가 조금씩 쌓일 때마다 그 결과를 (임팩트 팩터가 아주 놓은 저널이 아니라도) 논문으로 차곡차곡 출판하는 사람이 있고, 작은 논문 몇 개로 나갈 결과들을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가 소위 빅 저널에 큰 것 한 방을 터뜨리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연구를 처음 하는 입장에서 첫 논문으로 네이처나 사이언스를 쓰기는 극히 어렵다. 작은 논문을 계속 차근차근 출판하면서 경험이 쌓이면 나중에 큰 것 한 방을 노려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고, 방귀도 자꾸 뀌어야 똥이 나온다. 방귀도 안 뀌고 바로 큰 똥을 싸기는 실로 매우 어렵다.

리비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지적을 받더라도, 그 지적에 어떤 방식으로 우리 논리를 방어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테크닉적인 부분이 있다. 즉, 요구하는대로 다 고스란히 다시 데이터를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가래로 막을 일이라도 더 작은 호미로 영리하게 막는 방법을 떠올릴 수도 있다. 리비전도 자꾸 하다보면 실력이 늘어난다.

첫 논문을 내고 나면

장담하건대 논문이 나오는 시기는 당신의 계획보다 훨씬, 훨씬 늦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변수를 고려하고 보수적으로 계획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특히 첫 논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나도 그랬다. 나도 내가 실험 계획부터, 리비전까지 전체 과정을 주도했던 논문이 결국 출판되기까지는 계획보다 2년이 넘는 시간이 더 걸렸다. 여러 저널에서 차례로 리젝트를 세 번 당했고, 출판한 저널에서도 세 번에 걸친 리비전으로 추가 실험과 논문 수정에만 장장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이는 내가 생각했던 계획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그렇게 긴 세월이 걸릴 줄 알았으면 그 과정을 과연 시작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일단 논문을 한 번 내보고 나면 연구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아… 이게 이런 거구나’, ‘이 바닥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논문을 자꾸 써보면 전체 과정에 대해서 갈수록 익숙해지기 때문에 그 과정이 보다 수월하게 느껴진다.

더 좋은 것은 실험 계획을 세우고, 연구의 전체 구조를 만들 때에도 논문으로 마무리할 것을 고려하면서 하게 된다. 어떤 스토리가 논문으로 쓰기에 좋을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실험을 하고 데이터를 만들면서도, 혹은 논문에 문장 표현을 쓰면서도 내가 만약 리뷰어라면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가늠하게 된다. 연구를 시작하고 진행하면서 이미 논문을 마무리할 것까지도 능숙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게 되면 내가 원래 세웠던 논문 출판 계획보다 늦어지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첫 번째 논문에 대한 수락(accept) 메일을 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길고 길었던 리비전 기간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이번에도 안되면 어떡하나 고민하던 나날이었다. 연구실에서 늦게 기숙사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워 메일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자야지…하고 무심코 메일함을 열었는데 교수님께서 포워딩해주신 수락 메일이 띵 하고 떴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면서 만세를 불렀다. 내 첫 번째 논문이 세상에 나오던 순간이었다. 임팩트 팩터도 별로 높은 논문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지난했던 논문 작성과 리비전 과정이었던 만큼, 그 이후에는 나도 연구를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아무튼 논문을 쓰는 것에는 실험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역량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 역량과 기술은 논문을 직접 출판해볼 때만 체득할 수 있으며, 이후 논문을 내면 낼수록 더 능숙해진다. 이런 경험을 대학원에 들어간 이후 최대한 빨리 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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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대학원 연구노하우 온라인 세미나

제가 2016년 초에 ‘대학원 연구 노하우’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서 2시간 정도 공개 세미나를 했던 영상을 올려드립니다.

최근 저희 블로그에 새 글이 뜸해서 뭐라도 올려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세 명의 저자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거의 다 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처음에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서로 공유했던 집필 주제들을 대부분 커버하였거든요), 또 제가 요즘 1인 미디어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다보니, 예전에 유튜브에 업로드해뒀다가 썩히고 있던 컨텐츠가 기억나서요.

영상의 내용은 이 블로그에 제가 연재하는 내용의 모태가 되기도 했던, ‘내가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연구 노하우’ 슬라이드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 블로그에 제가 쓴 글 자체가 이 슬라이드를 근간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상당 부분 겹칩니다. 물론 블로그에 연재를 하면서 새로 추가한 내용도 많이 있지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비슷합니다. 심심하실 때 한번 들어보시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목소리만 들으니 제 컴플렉스 중의 하나인 사투리가 스스로도 거슬립니다만… 참고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영상과 함께 아래에 슬라이드도 다시 링크해드립니다.

저희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말씀드렸지만, 저희 저자들이 블로그 원고를 바탕으로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생각해보니 (세 명이 한국에서 모두 모이기는 힘들테고 – 실제로 아직 세 명이 한 번도 오프라인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ㅋㅋ) 나중에 또 온라인으로 이런 공개 세미나를 추진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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