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한다. 당신은 대학원에 가야 할 충분한 이유도 스스로 찾아냈고, 박사 학위가 가지는 의미도 이해했으며, 좋은 지도 교수님도 현명하게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어엿한 대학원생이 되었다.
시작이 반이다. 그러니 “드디어 대학원생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당신에게 고생문이 훤히 열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웰컴 투 더 헬!” 이라고 조금 과장을 섞어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당신의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가 힘들 것이다. 학부 때 연구 참여나 인턴을 해보지 않았다면 난생 처음 처해보는 환경과 역할, 교수님과의 관계, 선배들과의 관계, 과중한 업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연구 등의 상황과 한꺼번에 마주하는 것이 힘들 것이다. 내가 주위에서 보았던 바에 따르면, 대학원을 끝까지 마치치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저년차 때 그만둔다.
대학원..아니 마션의 첫문장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음 적응할 때에 대한 팁을 몇 가지 드리려고 한다. 혹은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쉽지 않을 테니 일단 이 악물고 가드 올리고 복부에 힘주고 각오를 단단히 하자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이야기들이 대학원 신입생 시절을 버텨내기 위해서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기를 바래본다.
1년차 때는 연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학원 신입생 때에는 자신의 연구를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아직 성숙한 연구자로서의 역량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연구에 할애할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여유나 정신적인 여력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대학원 1-2년 차에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 석사를 먼저 하는 경우도 그렇고, 석박 통합과정을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일단 학점을 따서 학위 과정을 수료해야 하니 수업이 있으면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과제나 팀 프로젝트를 적지 않게 내어주는 경우도 있다. 수업에 들어가는 시간, 숙제하는 시간만 하더라도 일과 시간의 상당 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학부 수업의 조교로 들어가야 한다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 필자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조교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학한 학과가 대학원에만 있었기 때문에, 조교를 할 학과가 학부에 없었다) 만약에 학부 조교를 해야 한다면 수업을 준비하고, 숙제나 시험을 채점하는 등의 활동에 피 같은 내 시간을 추가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또한 생명과학과처럼 기본적인 실험 기법을 익혀야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전공이라면, 실험 테크닉을 배우고 숙달되는 것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이런 경우 보통은 도제 관계로 특정 연구실 선배를 내가 따라다니며 (이렇게 도제 관계의 선배와 후배를 보통 ‘사수’-‘부사수’ 라고 부른다) 연구를 보조해주면서 조금씩 어깨너머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초반에는 사수의 연구를 도와주다가 점차 자신의 주제를 얻어서 독립적인 실험을 하게 되는 방식인데, 이 역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또한 연구실에서 파생되는 온갖 잡무들도 (연구실마다 차이는 있지만) 저년차들이 도맡아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청소부터 시작해서, 과제 관리, 각종 서류 작업, (운이 없으면) 교수님의 심부름이나 기타 잡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어진 수업, 숙제, 조교, 시험 배우기, 잡무…를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 중 일과 시간은 지나가고 저녁이 되어 있거나, 어느새 한 주가 지나가고 주말이 되어 있을 것이다. 대학원생들이 밤늦게까지 혹은 주말에 연구실에 남아 있고 싶어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슬프지만 그때가 아니면 내 스스로 연구할 시간을 가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확보해라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해라’ 고 조언하고 싶지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임은 필자도 잘 알고 있다. 필자도 대학원 신입생 때 논문도 좀 읽고 싶고, 내 연구도 얼른 하고 싶고, 선배들이 다들 하시는 실험도 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특히 연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다른 지적인 작업과 마찬가지로) 연속적인 시간의 확보가 아주 중요하다. 필자는 이에 관해 피터 드러커가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했던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지식근로자에게는 30분씩 따로 6번 일하는 것은 소용없고, 3시간의 연속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대학원에서, 특히 1년차 때는 수업, 숙제, 조교, 랩미팅, 저널클럽, 각종 연구실 행사에 시간을 쓰다 보면, 연속적인 시간의 확보가 매우 어려워진다. 논문을 좀 읽으려고 하면 처리할 일이 생기고, 실험을 좀 해보려고 하면 수업에 가야 할 시간, 데이터 좀 들여다보려면 랩미팅에 들어가야 하고… 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것이 결코 쉽지는 않고, 이를 위해서 모든 상황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조언은 없겠지만,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너무 무책임한 발언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필자도 신입생 때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을 고백하고 싶다.
필자는 대학원 1-2년 차 내내, 나는 마음껏 달리고 싶지만, 온갖 잡무를 처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달리려고 준비자세를 취할 때마다 또 다른 잡무가 생기면서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그때는 얼른 고년차가 되어서 잡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내 마음껏 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은 시기다.
방학은 연구를 위한 절호의 찬스
신입생 때 ‘연구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는 조언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방학”이라는 절호의 찬스이다. 신입생 때 연구를 조금이라도 진전시키고 싶다면, 방학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기회이다. (이는 비단 신입생 때뿐만이 아니라, 연차가 올라가도 마찬가지이다)
학부생 때 방학은 여행을 갈 수도 있고, 알바를 할 수도 있는 등 자신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설마 대학원생이 되어서 방학을 자유롭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자면 1년 차 여름 방학은 아마도 대학원 생활 처음으로 연구에 내 시간을 조금이라도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사실 방학이라고 해서 대학원생들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아침이면 출근해야 하고, 랩미팅에도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크게 바뀌는 것이 있으니, 바로 수업, 숙제, 학부생 조교라는 요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만 없더라도 내가 연속적으로 시간을 확보하여, 연구에 할애할 수 있는 여력은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므로 학기를 보내면서 방학이 되면 내가 가진 시간과 노력을 총동원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자. 연구에 열정이 있다면 방학이 가까워 온다고 좀 더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더 빡세게 연구에 몰입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학기 중에는 논문을 자세히 읽지 못하더라도 나름의 체계를 갖춰서 정리해놓고, 연구에 관한 가설이나 실험 아이디어들도 학기 중에 정리해놓자. 그러면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망설임 없이 바로 내 리소스를 투입하기가 좀 더 용이할 것이다. 필자는 대학원생 때 방학이 가까워 오면, 이제야 내가 그동안 계획해오던 연구를 좀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명이 나던 기억이 난다.
연구실의 인간관계
연구실도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 그리고 사실 매우 특수한 사회이고 왜곡되기 쉬운 사회이다. 연구실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교수님이라는 절대 권력자를 중심으로 연구실은 돌아간다. 하루 종일, 어떨 때는 주말까지 선후배들과 마주쳐야 한다. 선후배 사이에서도 위계질서가 엄격한 곳도 많다.
연구실 구성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대학원 생활에서의 삶의 질을 위해서도, 안정적인 연구의 진행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회 생활이 그렇듯이 가장 큰 고민과 갈등은 불편한 인간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구실 구성원과 불편한 관계가 되면 서로 불행해지고, 연구에도 지장이 커진다.
사실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대학원뿐만이 아니라, 이후 사회에 나가서 직장 생활을 하든, 외국에 포닥을 가든 마찬가지다. 다만 대부분의 대학원생이 대학원에 오면서 학생 신분을 벗어나 작은 사회 생활을 처음 한다는 점, 사회 생활을 처음 한다는 것은 사실 선배들도 마찬가지라는 점, 구성원이 많지 않고 서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낸다는 점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 인간관계가 왜곡되기 쉽다는 점이 위험 요소이다.
실제로 주변의 연구실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선후배, 혹은 동기들 사이에서 사이가 좋지 않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직접, 간접 경험했던 국내외 연구실에는 최소한 절반 가까이 구성원들 사이에 사이가 좋지 않거나,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 곳이었다. 슬프게도 그 작은 사회에서도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나 또라이가 심심찮게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연구실을 그만두는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연구실 별로 분위기가 다르고, 본인의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최소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선후배 사이에서, 학생과 교수 사이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선배가 후배에게, 교수가 학생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의있게 상대방을 대하고, 인간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연구에 대한 진지하고도 프로페셔널한 자세와 순수한 열정도 필요하다. 사실 이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일단 신입생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은 이러한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같은 값이면 회식이나 야유회, 엠티, 대청소 같은 연구실의 행사에도 되도록이면 잘 참여하도록 하도록 권하고 싶다. 필자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즐겨하지 않는 편이어서 (지금도 그렇지만) 회식은 질색이었다. 그래도 가능한 열심히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신입생 때는 연구실이라는 사회에 내가 첫 발을 내딛는 시기이고, 연구자 인생의 처음으로 학문적인 동료들을 가지게 되고, 그 동료들에게 나의 첫인상을 남기게 되는 때이다. 그 동료들은 어쩌면 앞으로 평생 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학문적인 동반자가 될지도 모른다. 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과 처음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보자.
허드렛일도 중요하다
연구실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신입생들이 연구실에서 실험을 위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청소는 기본이고 실험에 일상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준비들을 하는 것이다.
생명과 연구실을 예로 들자면, 세포를 배양할 수 있는 배지를 만들거나, 많이 사용되는 시약이 부족하지 않게 만들어서 보충해 놓거나, 실험 폐기물이 모이면 정해진 곳에 버리거나, 실험 기기를 관리하는 것 등이다. 컴퓨터 공학과 연구실이라면 서버 유지 관리 같은 것들이 그러한 활동일 것이다. 어떤 연구실은 이를 위해서 테크니션이나 알바를 따로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실은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으므로) 내부 인력을 통해서 해결한다.
이는 사실 귀찮은 일이다. 연구를 위해서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고 하다. 하지만 좋게 보자면 이 또한 실험의 기초가 되는 일이므로 장기적으로는 피가 되고 살이 될 수도 있다. 만약에 내가 박사를 하고 포닥을 한 다음에 드디어 내 연구실을 차리게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완전히 새로운 연구실을 세팅하기 위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것들도 알아야만 할 것이고, 새로 들어온 학생들을 지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 하찮은 허드렛일 등을 등한시하고 익히지 않았다가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왠지 변명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허드렛일을 피할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좋게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하자.
이번 글을 쓰다 보니, 왠지 핵심은 건드리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이야기를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앞서 언급했듯,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 처음 적응하기란 꽤나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첫 연구 주제를 어떻게 정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원래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이 주제인데.. 글이 길어지다 보니 별개의 포스팅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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